닥터진 송승헌-이소연, 반전에도 망가지는 커플?
건축과 마찬가지로 드라마도 기초공사가 매우 중요하다. 등장인물은 드라마의 기초공사에 해당한다.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에서 기초공사가 가장 잘 된 드라마는 ‘추적자’를, 반대로 아쉬운 드라마는 ‘닥터진’ 꼽을 수 있다. 추적자의 손현주-김상중-박근형 등은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만큼 목적이 뚜렷하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타인이 아닌 본인의 주어진 성격과 환경에서 우선해서 찾는다. 때문에 그들의 말과 행동에 개연성이 부여되고 시청자는 극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닥터진의 주인공 진혁(송승헌)은 목적의식이 희미하다. 본인이 최선을 구하려하지 않고, 타인을 주시하며 돌보고 치료하기 바쁘며, 사심이나 대가를 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환자를 고칠 때마다 발전해야 할 캐릭터와 스토리는 정체되고, 도돌이표를 찍는다. 심지어 진혁은 개인의 안위보다는 역사가 바뀔 것을 걱정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앞서, 영웅이 되겠다고 나서는 모양새니 시청자는 갸우뚱할 수밖에.
대조적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범수)은 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하고, 이를 위해 천재의사 진혁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이용할 줄 안다. 덕분에 이하응의 스토리는 자연스럽게 발전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현재 닥터진에서 개연성을 바탕으로 캐릭터가 변화하고 긍정적으로 발전한 건 이하응이 유일하다. 제목이 ‘흥선대원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닥터진에서 주인공 진혁의 캐릭터는 왜 고전중인가.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던 진혁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조선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진혁은 ‘호기심’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부정’ 그리고 ‘두려움’을 먼저 강하게 느껴야 했다. 조선이라는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소통의 부재로 언제, 누구로부터 목숨이 위협받을 지 모르는 위기 상황의 연속이다.
진혁에게 조선은 새로운 의술 전파하기 위한 또 다른 세상이 아닌, 시한부인생을 부여받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이 먼저란 얘기다. 이런 위기를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를 응용하면, 진혁의 상황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단계로 설명할 수 있고, 그 뒤에 충분히 반전을 꾀하는 전개 수순을 밟을 수 있었다. 스피드한 초반 전개를 진혁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풀었다면, 닥터진은 이하응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진혁중심의 의학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진혁도 처음엔 조선이란 곳에 떨어진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억울하게 살인범이란 누명을 쓰고 김경탁(김재중)에게 잡혀와 좌상(김응수)의 지시로 죽을 뻔한 위기도 맞는다. 그리고 좌상을 극적으로 살리면서 누명을 벗고, 활인서에서 활약하며 낯선 조선에서 당분간 무탈하게 살 수 있는 타협을 시도한다. 다만 수용하는 과정이 너무 빨랐다.
과정에서 황당한 상황(시간여행)에 처한 진혁의 심경이나, 어떻게든 혼수상태에 빠진 연인 유미나(박민영)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미래로 돌아가려는 고민의 흔적, 돌아갈 수 없어 좌절하는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돌아가는 방법을 구할 틈없이 환자를 받았다. 또한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서 살고보자는 개인적인 욕심이, 환자를 구하는 가장 큰 이유(수단)가 된 것도 아니고 수술성공 후엔 대가를 바라지도 않아, 캐릭터의 변화 폭이 상대적으로 제한됐다.
처음부터 양아치 의사였으면 모를까. 의사로서 소명의식이 꽤나 있었던 천재의사 진혁에게 조선에서 만난 환자들은, 그를 의사로서 한 단계 성장시키는 데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식이엄마(방은희)를 끝으로 소명의식이 100% 채워진 진혁에게 환자를 더 받는 건 변화를 추구해야 할 캐릭터엔 제자리걸음이 되고, 주로 이하응의 출세 혹은 홍영래(박민영) 의사만들기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만일 진혁이 의료기술을 무기로, 이기적인 대가를 구하려는 모습이 그려졌다면? 이하응과 친해진 목적이 그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될 것임을 알고, 언제 현대로 귀환할 지 모르는 진혁이 본인의 안위를 먼저 고려해 접근하고 친분을 쌓았다면, 지금처럼 진혁이 이하응에게 끌려 다니며 주도권을 내주진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접근이 잘못된 것임을 진혁이 나중에 깨달았을 때, 그가 한번 더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됐을 것이다. 그러나 진혁은 늘 능동이 아닌 수동적인 포지션에서 움직이고 변화를 추구하다보니 캐릭터가 정체된 인상을 주었다.
닥터진 12회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기생 춘홍(이소연)은 진혁이 먼 미래에서 온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혁이 미래로 돌아가려면, 그가 과거로 와서 살린 목숨으로 바뀌고 있는 역사를 원점으로 돌려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진혁은 춘홍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녀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구체적으로 미래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는지? 진혁이 가장 궁금할 대목인데 질문을 멈춰, 반전이 주는 효과가 반감됐다.
또한 춘홍이 이런 극적인 반전을 꾀한 타이밍도 개연성도 그다지 좋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진혁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왜 그동안 숨겼을까. 그동안 진혁이 익사직전의 자신을 비롯해서 홍영휘(진이한)와 좌상, 조대비 등 여러 사람 살릴 때는 방관하고, 심지어 계향(윤주희)이를 살려달라고 부탁하던 춘홍은 어디가고, 진혁에게 당신이 죽을 사람 살려서 문제가 생긴 것이니,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리라고 이제서야 말하는 걸까. 그동안 진혁의 간을 본 건가?
진혁의 입장에서도, 춘홍의 말을 무조건 신뢰할 게 아니라, 밤새도록 다그쳐서라도 자신이 조선에 온 이유와 돌아갈 방법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춘홍은 진혁에게 말을 아끼는 불친절을 또 다시 범했고, 진혁은 이번에도 친절하게 그녀를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다. 시청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보단, 아끼면 똥이 될 반전을 이유로 다시금 맥빠지게 만든 셈이다.
반전의 트릭은 제작진만 알고 시청자가 모르는 ‘요건 몰랐지?’가 아니다. 시청자가 반전의 가능성을 어느정도 인지한 상황에서 터져야 빛나는 법이다. 시청자는 그 예감을 캐릭터와 스토리의 개연성에서 유추한다. 해당 인물이 일관된 흐름속에 움직이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을 때 반전도 설득력을 갖는다.
기생팔자 운운하며 진혁에게 추파를 던졌던 춘홍이었다. ‘진혁이 미래에서 온 사람일까?’ 긴가민가하며 춘홍의 의심이 그려진 적도 없었고 확신했던 장면도 없었다. 미스터리한 여인이긴 하나 점을 칠 줄 아는 기생수준으로 그려졌다. 그 미스터리가 무명계 일원으로 풀려서 끝나나 했더니, 이번에 시간여행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결국 춘홍은 기생에서 미녀첩보원, 그리고 이제는 진혁의 신상은 물론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보며 모든 해결에 키를 쥐고 있다. 춘홍의 갑작스럽고 황당해 보였던 반전을, 과연 제작진은 앞으로 어떤 개연성으로 포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