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약속, 수애의 기저귀가 남긴 것은?
박지형(김래원)이 딸 예은과 함께, 아내 이서연(수애)의 무덤을 찾았다. 기억이 소멸되고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 아내 서연과 달리, 여전히 “난 아직이다.”라며 사랑했던 아내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남편 지형의 모습을 뒤로하고, ‘천일의 약속’ 마지막회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이 굉장히 무덤덤하게 다가왔다. 뭔가 진이 빠진 느낌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왜?
멜로드라마의 마지막회, 마지막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감동과 여운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박지형이 치매 아내 이서연을 돌보느라 그동안 정말 고생했고, 이제는 좀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20일 방송된 천일의약속 마지막회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인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서연의 엽기적인 돌발행동이 쉴새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회부터 19회까지 보여줬던 이서연의 치매행각은 약과였다. 치매증상의 절정을 보여주듯이, 남편 박지형은 ‘아저씨는 누구세요?’가 돼버렸고, 거울속에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백화점에서 서연의 옷을 사온 사촌언니 명희(문정희)는 난데없이 뺨을 맞았고, 파출부로 전락한 살신성인 고모(오미연)는 거실 바닥을 닦다가 서연의 발등에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남편 지형이 달려와 온몸으로 서연을 말리지 않았다면 고모는 로우킥이 남다른 그녀에게 제대로 험한 꼴 당할 뻔 했다.
그러다가도 서연은 문득 문득 제정신을 찾았고,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해 가족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고자 했다. 시시각각 냉온을 오가는 서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슬퍼질려고 하면 웃기고, 웃다보면 무섭고, 무섭다보면 안타깝다. 서연이 무슨 행동을 할 지 무서울 정도로 몰입은 잘 됐지만, 서연마냥 시청자의 감정도 뒤죽박죽되기도 그만큼 쉬웠다.
오직 일관된 건, 서연을 돌봐야 하는 주변사람들이 참 힘들겠다. 남편도 힘들고, 문권이도 힘들고, 고모도 힘들고, 고모네 식구들도 힘들고... 병마와 싸워야 하는 여주인공 서연이 불쌍하기도 전에, 지쳐가는 그녀의 주변사람들이 먼저 안쓰럽게 느껴졌다. 사랑이고 순애보고 생각할 여지없이, 치매라는 질병이 여러 사람잡는 구나에 꽂힌다. 덕분에 지형이 서연의 무덤에서, ‘난 아직이다.’라며 말한 대사에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천일의약속, 수애의 기저귀가 남긴것은?
물론 눈물나는 감동도 있었다. 오밤중에 서연이 기저귀차는 연습을 하고 있었고 이를 목격한 지형이 그녀를 안으며, (기저귀를) 안 해도 된다고 눈물을 쏟은 장면이었다. 고모가 서연이 똥오줌을 못가릴 거 같으니 기저귀를 채우자고 제안했고, 지형은 어렵게 서연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서연은 내가 왜 기저귀를 하냐며, 날 무시하냐고 오열한 후 벌어진 일이었다.
서연이 기저귀차는 연습을 한 것은 살고자하는 본능이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본능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치매로 인해 눈치만 빠삭해진 서연이, 기저귀를 차야 남편이나 고모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란 본능. 지형은 서연의 행동을 보고서야 이해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서연이 기저귀를 차야 모두가 편하다. 그러나 모두가 편하기 위해,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인격이 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것. 아내가 아니라 남편인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 아내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음을.
이서연의 기저귀는, 편하게 접근하면 치매환자도 상처받고 가족도 상처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불편하게 접근하면 환자를 돌봄에 있어, 힘은 더 들겠지만, 상처는 덜 주고 덜 받을 수 있다는 것. 그 단순하면서도 지키기 힘든 사실을, 30살의 여주인공 이서연에게 기저귀를 채우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으로 풀어냈고, 천일의 약속이란 드라마안에서 만큼은 치매의 끝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서연의 기저귀사건은 분명 감동과 여운이 있었다. 그러나 서연과 지형의 마지막이 기저귀라는 매개체로 마무리된 점은 보는 이에 따라, 아쉬울 수 있었다. 리얼리티보단 멜로드라마라는 판타지에 어울리게, 보다 애틋하고 아름다운 장면속에 이서연의 마지막을 기대했던 시청자도 있기 때문이다.
문득 영화 ‘내머리속에 지우개’의 마지막장면이 떠오른다. “여기가 천국인가요?” 이서연과 같은 알츠하이머를 앓았던 극중 여주인공 손예진이 편의점에서 했던 말이다. 남편 정우성을 처음 만났던 장소가 편의점이었고, 그들 부부가 다시 재회한 장소도 편의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 손예진에게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과 장소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고, 그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천국에 온 느낌을 받았던 셈이다. 덕분에 많은 관객에게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같은 알츠하이머 여주인공이었지만, 마지막에 손예진은 추억으로 판타지를 남겼고, 수애는 기저귀로 리얼리티를 남겼다. 누구의 마지막이 더 낫다거나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다. 특히나 영화와 달리, 20부작 드라마에서 치매를 미화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천일의약속의 마지막은,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김수현작가 스타일의 연장선에 있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김수현작가의 단막극을 좋아한다. ‘홍소장의 가을’, ‘어디로 가나’, ‘혼수’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다. 특히 ‘어디로 가나’는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를 돌보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현실감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천일의 약속’과 닮은 점도 없지 않다. 때문에 천일의약속도 20부작이 아닌, 3부작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8부까진 쉴새없이 몰아치다가, 멜로에 치중한 중반 이후로 느슨해졌고 막판 서연의 치매증상 악화로 다시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천일의약속 마지막회는 훌륭했다. 몰입도도 높았고, 에피소드는 현실감이 돋보였으며, 치매연기를 잘 소화해 낸 수애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잘 녹아들었다. 그럼에도 2%로 부족했다. 마지막회에서 보여준 집중력과 템포가, 8회 이후부터 늘어진 멜로와 잘 섞이질 못했다. 때문에 마지막회가 정교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다닥 해치운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고, 시청자는 감동과 여운을 느낄 충분한 여유가 없었던 게 옥에 티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