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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황태자아닌 검투사를 키워라

바람을가르다 2009. 8. 14. 06:16

 

내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남미의 강호 파라과이를 홈으로 불러 평가전을 가진 한국축구대표팀이 1:0의 승리를 거뒀다. AS모나코에서 뛰는 박주영의 결승골로 남미축구에 대한 징크스를 날린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한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경기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개운치 못한 뒷맛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대표팀이 잘했다기보단 파라과이가 실력의 반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승리였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희망 박주영과 허정무의 황태자란 누더기를 뒤집어 쓴 이근호.

박주영과 이근호를 통해, 프랑스리그와 J리그의 차이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준 경기였다.

 

이근호는 전반내내 무리한 드리블을 하다 볼을 뺏기는 실수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J리그에선 돌파가 가능했을지 몰라도, 한단계 수준 높은 선수들을 상대로는 그의 개인기는 통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반전 최고의 찬스라고 볼 수 있는 이동국의 원터치 패스에 슛팅타임을 놓쳐버린 장면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근호의 최대 약점은 문전앞에서의 슛팅타임이다. 고질병이라고 느껴질 만큼 슛타임이 한박자 늦다. 그렇다고 해서 수비수를 벗겨낼 만큼 볼 컨트롤이 좋은 것도 아니다. 논스톱으로 때려야 할 찬스를 이번 경기 뿐 아니라, 지난 최종예선과 평가전을 통해 수차례 반복한 그를 보면, J리그에서 잘못 배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반면 박주영이 원터치 패스를 통해 동료들을 활용하는 점과 수비수에 앞선 위치선정, 그리고 반박자 빠른 슛타임은 왜 그가 유럽축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이근호는 잘못된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 지난 UAE전에서 이영표가 찔러 준 패스를 논스톱슛으로 연결해 골을 만들었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월드컵에선 많은 찬스가 오지 않는다. 한번의 기회를 끌어서는 곤란하다. J리그의 맞춤형 선수에서 벗어나야, 굴욕을 안겨 준 파리 생제르망이 아닌 어느 유럽축구클럽을 진출하더라도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대표팀의 구멍 김정우.

 

수비형 미드필더 김정우의 경쟁력이 곧 한국축구 대표팀의 경쟁력이다. 팀의 중심축이라고 볼 수 있는 중앙 미드필더가 이렇게 약해서야, 남아공월드컵 16강의 부푼 꿈은 깨는 것이 나을 듯 싶다. 나약한 피지컬은 둘째치고, 상대에게 1대1 돌파를 수차례 허용한다. 몸싸움이 안 되면 발재간이라도 있어야 하질 않나. 눈에 보이는 볼배급에 상대가 차단하기 좋은 느린 패스. 잦은 패스미스로 여러차례 상대에게 역습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나서, 그가 보여주는 거라곤 발이 아닌 손으로 상대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파울. 위험지역에서 반칙도 문제지만, 공격축구를 지향하는 FIFA의 룰이 더욱 강화될 남아공월드컵에서 자칫 경고나 퇴장으로 팀에 무거운 짐을 지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불안요소임에 틀림없다. 단순히 공간을 압박하는 능력만으로 김정우를 과대평가해선 곤란하다. 



 

그럼에도 김정우는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 미드필더를 꿰차고 있다. 허정무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황태자. 현재 중앙에 기성용과 조원희가 대체 카드로 볼 수 있지만, 이들로는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윙어 자원이 비교 우위에 있는 만큼 박지성을 중앙에 놓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더군다나 4-4-2 로는 중앙을 주 공격루트로 삼는 강팀과 맞서기에 버겁다. 중앙이 고속도로인데 사이드만 강화하면 무엇하나.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경기는 4-4-2로 가되, 어차피 한 수위의 팀과 맞설 땐 4-5-1로 가야 초반 실점을 막을 수 있다. 공격형 미드필더에 박지성을 놓고 더블 볼란치를 두는 것이 그나마 상대의 예봉을 차단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박지성-기성용-조원희가 현재로선 최상의 카드라고 여겨진다.

 

허정무감독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매번 대표팀 선발에 있어, 공격수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포워드가 아닌 중앙 미드필더를 찾는 데, 더 힘을 써야 할 시점이 아닌가? 더 나은 선수가 없다는 식의 논리는, 선수를 뽑아 기용한 뒤 얘기해도 늦지 않다.

 

오범석의 경쟁력과 차두리의 필요성

 

이날 대표팀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보인 선수는 좌측 풀백 이영표와 중앙과 우측을 번갈아 맡은 이정수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이 버틴 수비진은 서너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런 위기없이 한 게임을 소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운영을 선보였다고 평하고 싶다. 다만, 전반전 오른쪽 풀백 오범석은 경기 감각이 떨어진 듯 영양가없는 오버래핑과 부정확한 패스로 인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모습을 번번히 노출한다.

 

문제는 줄곧 대표팀의 오른쪽 풀백자리를 꿰차고 있는 오범석의 경기력이다. 꾸준함은 있되, 발전없는 실력으로 월드컵에서 맞설 공격수와 윙백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같은 포지션이며 분데스리가 프라이부르크에 뛰고 있는 차두리의 발탁으로 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유럽리그에서 활약해서가 아닌 피지컬, 스피드, 크로스 등 오범석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차두리를 붙여 놔야 전술적 변화를 꾀하기 용이하지 않겠는가.  


 

골키퍼 또한 이운재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른 선수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 분명 이운재에게도 기복이 존재한다. 월드컵에 출전하는 당일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가 베스트가 되야함에도, 평가전마저 붙박이로 세우는 건 근시안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평가전이란 게 무엇인가? 조직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며칠사이에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팀의 부족한 부분에 새로운 선수로 보강하고 실전에 투입해 봄으로써, 선수들간엔 선의의 경쟁을 부추기고, 대표팀의 약점을 보완해 가야 하지 않나? 박주영의 골을 이끌어 낸 이승현이 좋은 사례 아니던가. 현재 대표팀을 보면 허정무의 애제자와 황태자가 넘쳐난다. 지난 날 히딩크가 싹을 잘라버렸던 그 옛날의 파벌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다. 대표팀엔 황태자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할 검투사들이 필요하다.

 

남아공 원정길에 승선할 23명의 태극전사는 오직 정당한 경쟁을 통해, 이름이 아닌 실력으로 추려져야 한다. 미완성된 대표팀에 최종예선에서 활약했다고 해서 월드컵에 무임승차는 곤란하다. 허정무호가 16강을 위해 달리려면 쓸데없이 족보 만들 생각따윈 버리고, 정에 의해서도 감에 의해서도 아닌, 눈으로 선수를 발탁하는 지혜를 발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