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vs네덜란드'경기에, 염기훈이 있다?
남아공월드컵 조별예선 2차전, '한국vs아르헨티나' 1:4의 참패는, 붉은악마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유는 단순히 패배에서 온 실망이 아닌, 우리 대표팀의 기량을 반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비축구를 한다고 해서 골을 안 먹는 건 아니다. 후회만 남을 뿐이다."라는, 경기 후 이청용의 인터뷰가 뇌리에 남는다. 아마도 대한민국 축구팬이라면 대부분 공감하지 않았을까. 특히나 아시아의 맹주 한국은, 수비축구를 한 경험이 거의 없다. 강팀과의 평가전에서조차, 전방부터 압박하는 정상적인 경기운영으로, 코트디부아르, 덴마크, 세르비아, 스페인 등과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었고, 그리스를 2:0으로 완파하는 기염을 토했었다.
반면 아르헨티나전은 하프코트에 가까운 수비로 전반에만 두골을 헌납했고, 공격다운 공격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역습이란 것도, 1선과 2선, 3선의 간격이 어느정도 유지돼야 가능하다. 최전방 공격수 박주영마저 미드필더라인까지 내려와 수비에 치중해선, 역습찬스를 잡을 수가 없다. 그나마 후반 초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수비라인을 끌어올림에 있었다.
일본축구, 왜 인상깊었나?
23일 나이지리아전을 앞둔 대표팀에게, '일본vs네덜란드'의 경기는 좋은 참고서가 될 만했다. 막강한 공격력을 보유한 네덜란드에게 0:1의 패배를 당하긴 했으나, 일본은 카메룬전보다 나은 경기력을 보이며, 오렌지군단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특히 인상깊었던 건, 전방부터 상대를 압박하며, 치열한 중원싸움을 전개한 경기운영이었다.
이청용의 인터뷰가 오카다재팬에 강림한 듯 했다. 단순한 수비전술이 아닌, 전형적인 그들만의 축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팀이 가장 잘 소화할 수 있고 효과적으로 플레이 할 수 있는 토대는, 선수들에게 익숙한 전술이다. 아무리 좋은 전술도 내가 익숙하지 않고, 잘 소화하지 못할 땐, 소용이 없다.
네덜란드전에서 사용한 일본의 전술은, 카메룬전과 다르지 않았다. 같은 전술로, 더 강한 상대와 맞섰다. 비록 패배하긴 했으나, 경기력은 오히려 향상됐다. 허정무호가 나이지라아전을 앞두고 생각할 것은, 다른 팀의 좋은 전술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에게 가장 익숙한 전술을 토대로, 한국만의 색깔있는 축구를 하는 것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일본vs네덜란드' 경기에도, 염기훈이 있었다?
네덜란드전은 일본에게 아쉬운 경기로 남았을 것이다. 특히 종료를 앞두고 완벽한 찬스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오카자키 신지의 슛은, 비길 수 있던 경기를 패배로 이끌었다. 마치 아르헨티나전 염기훈의 왼발슛을 보는 듯 했다. 발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 골대를 비켜 간 것. 골이 아닌, 노골이 실질적인 승부의 마침표가 된 것이다.
오카자키의 안드로메다 슛이 더욱 안쓰러운 건, 네덜란드에도 염기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완벽한 1:1 찬스를, 가와시마 골키퍼의 선방에 막힌 아펠라이의 슛. 선방이라기보단, 아펠라이의 슛에 센스도 킬러본능도 읽을 수 없다. 덕분에 네덜란드는 경기의 주도권을 일본에 내주고, 쉽게 갈 경기를 막판 수세에 몰렸던 것이다. 네덜란드가 일본과 비겼다면 역적이 될 뻔했던 아펠라이.
아르헨티나전의 패배는, 선수기용 실패, 한국팀 옷에 안 맞는 지나친 수비전술을 꺼내 든 허정무감독에게 있다. 그러나 차두리를 대신해 출전한 오범석과 완벽한 골찬스를 놓친 염기훈을 향한 네티즌의 질타가 쏟아졌다. 실질적으로 감독이 감수해야 할 비판을, 선수와 나눠 먹는 상황에 이른 것.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완벽한 골찬스를 놓친 염기훈이, 네덜란드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었다. 그리고 월드컵을 보다보면 염기훈과 같은 경우를 너무 많이 접할 수 있다. 94년 미국월드컵에서 수차례 찬스를 날리고 수많은 욕을 먹었던 황선홍도,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명예회복을 했었다.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넣었던 설기현도 생각난다.
이번 월드컵에선 염기훈이 가장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vs네덜란드'전에서 오카자키와 아펠라이를 보면서, 염기훈에 대한 실망과 미움이 가라앉는 나를 본다. 그리고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 글귀가 생각났다. 실수가 되풀이되는 것이 인생이며,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 받을 수 없다는 말. 나의 불행을 위로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타인의 불행이란 사실.
만일 오카자키의 슛이 들어갔다면, 그리고 네덜란드와 일본이 비겼다면 염기훈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게 변했을까. 허정무감독이 염기훈에게 명예회복의 시간을 줄지는 모르겠다. 이동국도 대기중이며, 이승렬, 김보경 등 다른 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 대한 실망과 비난의 글은, 비단 염기훈 뿐 아니라, 경기를 앞둔 대표팀을 위해서도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