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및 드라마

추노, 언년이 민폐리스트, '때문에vs덕분에'

바람을가르다 2010. 2. 20. 10:10




인기드라마 <추노>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리고 중심에 언년이와 혜원을 오가는 이다해가 있다. 그녀의 연기와는 별도로, '언년이&혜원'이라는 캐릭터는 시청자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극중에서 그녀는 상상을 초월(?)하는 민폐의 끝을 달렸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언년이 때문에'라는, 언년이 민폐리스트가 네티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을까.

언년이 민폐 리스트가 자체가 군데군데 과장되어 풀어내긴 했으나, 굳이 연결짓자면 틀린 말도 아니다. 리스트를 그대로 해석하면 언년이는 조연들의 줄초상에 원인이었고, 드라마세트장을 뭉게 버리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한 셈이 됐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언년이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 드라마의 뿌리이며 줄기가 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언년이 때문에'가 '언년이 덕분에'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언년이 덕분에' 민폐 리스트

1. 언년이때문에 대길이 집 망함
→ 덕분에 대길이 양반이 아닌 추노꾼되었다. 드라마가 태어난 소스 제공
2. 언년이때문에 송태하(오지호)스승 손도 못써보고 죽음
→ 어차피 카메오라 살아도 의미없음. 언년이 덕분에 철웅(이종혁)은 칼솜씨 뽐내며 본인의 가치를 상승시킴
3. 언년이때문에 이화룡아저씨 개쪽당함
→ 언년이 덕분에 이화룡 출연.
4. 언년이때문에 언년이오빠 개쪽당하고 개고생함
→ 큰놈이는 콤플렉스가 많았다. 오히려 쌓였던 울분을 터트리는 계기를 만들어 줌
5. 언년이때문에 백호(데니안)부하2명 죽음
→ 살아있어도 도움 안 됨.
6. 언년이때문에 포졸2명 죽음
→ 포졸이 죽어도 상관없지만, 진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음, 추노에서는 잘 살아남. 
7. 언년이때문에 시골노인집 헛간 부서짐
→ 언년이때문이 아님. 송태하때문
8. 언년이때문에 스님 성불 못함
→ 잘하고 있던데?
9. 언년이때문에 백호(데니안) 칼 맞음
→ 언년이 덕분에 뜸을 받던 굴욕 씻고, 존재감 떨침.
10. 언년이때문에 대길이 칼 맞음
→ 대길이 철웅의 칼에 베이지 않았다면,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할 상황. 오히려 대길이 언년이를 바라보다 철웅에게 칼 맞고 쓰러진 게 전화위복. 
11. 언년이 모자이크때문에 시청자들 다 허탈함
→ 모자이크는 제작진 때문이다
12. 언년이때문에 천지호(성동일) 부하 3명 숨짐
→ 억지네
13. 언년이때문에 자객 윤지민 숨짐
→ 언년이 덕분에 자객으로 출연할 수 있었음. 누구땜에 고용했는데...
14. 언년이때문에 데니안 숨짐
→백호가 대길을 죽이려 했음. 대길이 죽으면 드라마가 끝남. 그 상황에선 백호가 죽는 게 당연. 장렬하게 전사할 타이밍을 주었음 
15. 언년이때문에 송장군 팔 구멍 생김
→ 덕분에 사랑 급진전
16. 언년이때문에 언년이 오빠 숨짐
→ 업보
17. 언년이때문에 언년의 유혹 탄생
→ 그럼 놀아?
18. 언년이때문에 송태하 합류 늦어서 궁녀 죽음
→ 이건 언년이 때문이 확실함. 궁녀가 죽어야 언년이가 석견마마를 모실 수 있음
19. 언년이때문에 배도 늦게 띄움
→ 언년이와 태하의 합작품. 덕분에 키스신. 배우들은 좋았을 터.
20. 언년이때문에 시청자들 속터질라함
→ 그럴 수 있음
21. 언년이때문에 설화 대길이한테 청혼 실패
→ 설화(김하은)도 민폐로 따지면, 언년이 못지 않음
22. 언년이때문에 10년 전 죽은 송태하 부인 하늘에서 대성통곡
→ 억지2
23. 언년이때문에 송태하 구하라는 나라 안 지키고 연애질 중
→ 나라지키는 사람들은 연애하면 안 되나?
24. 언년이때문에 대길이 폐인됨
→ 덕분에 장혁의 연기력 폭발



언년이는 시청자에게 민폐고 밉상인 캐릭터로 찍혀 있었다. 그러나 대길이 추노꾼이 된 것도, 국가의 안위밖에 모르던 태하의 심장이 뛰는 것도 민폐녀 덕분이다. 그녀의 민폐가 드러날수록 드라마의 내용은 진전되고, 생사의 갈림길에 들어 선 인물들은 요동쳤다.

오히려 현재 지나치게 강한 여성으로 진화하려는 언년이의 몸부림이 낯설다. 그런 그녀가 대길 도련님이 살아있음을 알게 됐다. 이다해의 나레이션은 거슬렸지만, 눈물 연기는 출중했다. 이제 그녀는 피하고 픈 대길을 맞닥뜨려야 하고, 그와 태하사이를 오가다 홀로서기에 들어간다면, 더욱 강한 여인네가 될 것이다. 그 때쯤이면, 민폐를 일삼던 언년이가 그리울 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추노'에서 최고의 민폐를 꼽는다면 언년이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시청자를 낚앗던 제작진에게 있다. 시청률에 얽매여, 몇 프로 더 올려보겠다고, 스스로 명품드라마이기를 포기한 듯한 행보를 걸었기 때문이다.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가능한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수단에 있어 캐릭터의 일관성을 잃어버린 상태로 진행되거나, 극의 흐름과 배치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접목시킨다면, 드라마의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언년이가 민폐녀라고 비판받았다해서, 겁탈하듯 캐릭터를 벗겨내면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살인귀가 된 황철웅(이종혁)이 칼로 베어버린 왕손이(김지석)가 대길의 의형제라는 이유로, 죽어버린 목숨을 구제해준다면 그건 코미디가 될 수 밖에 없다. 시청자에 따라 언년이 '때문에'가 언년이 '덕분에'로 해석할 수 있듯이, 추노의 제작진이 쫓아야 하는 것은 도망노비도, 시청자도 아니다. 바로 극의 흐름을 관통하는 일관성이며, 제작진이 처음 임했던 초심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