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어설픈 프로포즈 살려 낸 장혁
11일 방송된 <추노> 12회에서도 여지가 없었다. 긴장의 문을 연 것도, 저마다의 캐릭터가 튀는 것을 달래고 아우르는 중심에 이대길(장혁)이 있었다. 거친 남자의 화끈한 액션도, 슬픈 남자의 뜨끈한 눈물도 그에게서 빛이 난다. 어지럽고 산만하게 흩어진 내러티브를 조이고, '이대길의 사랑'만 믿고 달려도 좋을 만큼 '추노'는 그를 쫓았다.
대길의 칼끝이 혜원(이다해)과 태하(오지호)의 얼굴에 꽂혔다. 세 사람의 갈등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낸 이 장면은, 구로사와 아카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행복에 겨워 서로 마주보며 웃고 있는 혜원과 태하는, 결국 애증으로 고통받는 대길의 칼끝 위에 놓일 수 밖에 없다.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운명.
이오커플의 어설픈 프로포즈마저 살려 낸 장혁
인조(김갑수)에게 반기를 들 시점을 찾고 있는 조선비(최덕문)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한 사내이다. 원손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조선비가 피묻힌 칼을 통한 혁명을 추진하려 하자, 태하는 불안한 기색을 노출한다. 조선비는 멈칫하는 태하의 눈빛에서 여자(혜원)를 보고, 그녀가 혁명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 판단한다.
조선비의 생각을 모를 리 없는 태하. 혜원을 아내로 맞이해야 그녀의 안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 때 이른 프로포즈를 감행한다. 정색하는 혜원앞에 오지네이터 송태하는 뻘줌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조선 최고의 무사 송태하의 카리스마가 말발 좋은 조선의 여인네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그녀의 거절 이유는 황당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듣지 못해 한(恨)이 된 듯 하다. 하기사 그 옛날, 대길에게서도 사랑이란 말은 듣지 못했던 언년이. 원손마마를 품에 안고 백만대군을 거느린 듯, 강한 여인네로 변신을 꾀하는 그녀. 그러나 민폐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기엔 적절치 못한 타이밍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여러차례 구해준 태하였다. 시청자의 비난속에 딥키스까지 나누었던 두 사람이다. '혼례가 장난이냐'며, 프로포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듯 불편한 심기로. 그를 쫓아낸 상황은 혜원답지 못했다. 아직도 우려내야 할 민폐가 남았던가. '사랑'이란 말보다 태하의 진심을 읽었다면 눈물 한방울과 함께 말없이 OK사인으로 마무리했어야 아름답지 않았을까.
'I'll be back.' 오지네이터. 은혜도 의리도 아닌 오로지 그대만이 내가슴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태하의 두 번째 프로포즈. '파리의 연인'이 아닌, '추노의 연인'판 '내안에 너 있다.'. 시청자의 입장에선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혜원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로 그거야.'라는 듯이 태하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버스 떠난 뒤, 손을 흔든 격이 아닐 수 없다. 감동도 없었지만, 최근 드라마에서 본 프로포즈 중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원샷원킬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면, 태하도 살고 혜원도 살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1차 프로포즈에 실패한 태하는 안타깝기 보단 다 죽여버린 카리스마를 어떻게 살려낼 지 걱정부터 들었고, 안 그래도 2010 '민폐의 여왕'으로 등극한 혜원이, 네티즌들의 벌집을 건드린 게 아닐까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의 어설픈 프로포즈마저, 장혁의 소름 돋는 연기가 살려내고 만다. 두사람을 덮치기 위한 이대길의 눈앞에, 혼례를 앞두고 싱글벙글한 이오커플의 얼굴이 교차했다. 어설픈 프로포즈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감탄만이 모든 설명이 되는 장혁의 연기 미학.
<추노>에서 장혁은 조선시대 최고의 추노꾼이 아닌, 허준보다 뛰어난 명의라고 할 수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가 닿는 장면마다 빛이 난다. 죽었던 장면마저 기어코 살려내는 장혁이야 말로, 연기의 달인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