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조선판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
웰메이드 드라마로 평가받는 <추노>를 일컫어, 조선판 '매트릭스'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지만 이것은 액션부분만 떼어 놓고 봤을 때에 불과하다. 실질적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맞춰 본다면, 98년도 일본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 (Cowboy Bebop)'고 닮았다고 할 수 있다.
1회 때 대길 장혁이 탁자위를 뛰어올라 발로 찼던 액션신에서 볼 수 있듯이, 카우보이 비밥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가 오마주의 대상으로 삼았을 정도로 뛰어난 수작이다. 오프닝 주제곡 'Tank'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스피디함과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자주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타락천사를 위한 발라드'편에 'Green Bird'가 더 인상깊게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재즈가 극을 감싸고 있다.
도망노비를 쫓는 현상금 사냥꾼 추노패들을 중심으로 조선중기 민초들의 삶을 훑으며, 인조주변의 권력 암투를 그리는 <추노>.
표면적으로 '현상금 사냥꾼'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는 게 닮았다면, 조선중기의 '과거'를 배경으로 한 <추노>와 미래의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카우보이 비밥>은 다르다. 물론 내용과 구성에서도 이질감이 있다. 카우보이 비밥은 매회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매번 바뀌는 현상금리스트에 인물들을 추적하며 인간의 다양한 고뇌와 갈등을 다뤘다. 반면 추노는 '양반과 노비'라는 극단적 신분사이를 관통하며,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고 사회풍자를 모토로 하고 있다.
추노, 조선판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
추노와 카우보이비밥을 닮은 부분은, 주요인물들의 관계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캐릭터는 다르되 설정이 닮은꼴이다. 일단 추노패를 구성하는 '대길(장혁)-최장군(한정수)-설화(김하은)-왕손이(김지석)'와 비밥호의 '스파이크 스피겔-제트 블랙-페이 발렌타인-에드'가 그러하다.
추노의 캐릭터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카우보이 비밥의 인물들만 정리해 보겠다. 바보 온달형의 철없는 재벌 2세와 같이 일반적으로 드라마상 남자주인공들의 캐릭터는 비슷하다. 같은 선상에서 주인공 스파이크 스피겔과 대길은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다. 스파이크는 총을 다루지만, 절권도에 능하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시크한 매력이 있다. 대길에게 언년이가 그러하듯, 스파이크에게 줄리아는 상처를 주었고, 그가 찾아야 하는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다. 마피아 조직 '레드드래곤'의 간부였으나, 동료 비셔스의 배신으로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아간다. 줄리아와도 연관된 비셔스와 마지막에 승부를 가린다. 스파이크는 조직을 빠져 나올 때 죽다 살아난 케이스로 당시 한쪽 눈을 잃었다. 그의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이유다.
눈만 보면 제트 블랙과 대길이가 닮았다. 그러나 전직 경찰이었던 제트의 역할을 추노에선 최장군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구보다 스파이크를 잘 알고 이해하며 든든한 조력자다. 곧은 성품과 사리분별력을 갖췄다. 반면 소년인 듯하지만 소녀인 에드는 전문 해커다. 4차원 캐릭터라 왕손이와는 전반적으로 배치된다.
섹시한 매력을 품었으나 남성적인 성격의 페이 발렌타인과 사당패 출신의 여성적인 설화와는 다르다. 아이리스에 김소연이 오히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스파이크에게 살짝 연정을 품은 듯 하나, 표현한 적 없고 훼방을 놓지도 않는 민폐와는 거리가 멀다. 프로페셔널한 전문직 여전사다.
스파이크가 찾는 연인 줄리아는 같은 '레드드래곤'의 일원으로 함께 조직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비셔스의 협박으로 스파이크를 살리기 위해 조직에 남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스파이크는 약속을 져버린 그녀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줄리아는 언년이(이다해)와 달리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거친 액션을 소화하는 양면이 공존한다. 반면 회상신을 제외하곤 거의 나오지 않다가, 말미에 나와 극의 비중에서 차이가 있다.
스파이크의 숙적 비셔스는 총대신 검을 다룬다. 송태하(오지호)와 달리, 성품이 올곧지 못하고 후에 쿠데타를 일으켜 조직의 수장이 된다. 친구이자 동료 스파이크를 배신하고 그의 연인 줄리아를 뺏어간 전형적인 악의 축. 그러나 그도 스파이크와 마찬가지로 방황하는 쓸쓸한 영혼에 불과하다. 같은 피를 흘릴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 이렇듯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닮은 듯 다르다. 그러나 관계도와 설정의 측면을 놓고 볼 때, 유사한 점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추노>뿐 아니라 어차피 모든 드라마가 전혀 새로운 인물들과 설정이란 토대에 스토리를 쌓아올리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세상에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겠나 싶기도 하고.
카우보이 비밥은 TV로 총 26회가 방송됐고, 인기를 등에 업어 극장판 '천국의 문'이 2001년도에 개봉됐다. 키아누리브스 주연에 실사판이 제작된다고 하는데, 부정적인 느낌부터 든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주인공 스파이크 스피겔을 키아누리브스가 표현하긴 무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스파이크는 매트릭스의 네오가 아니다. 보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쓸쓸한 아픔과 고독을 품고 있는, 오직 애니안에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스파이크 스피겔이 있다. 마치 <추노>의 대길이가 장혁이 아닌 다른 배우라면,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