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및 드라마
<선덕여왕> 비담을 무너뜨린 염종은 악인아닌 광대?
바람을가르다
2009. 12. 23. 13:26
모든 걸 가졌지만, 사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덕만(이요원)의 눈물과 함께 인기드라마 <선덕여왕>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특히 마지막회에서는, 덕만의 눈앞에서 김유신(엄태웅)의 칼에 의해 최후를 맞은 비담(김남길)으로 인해, 많은 시청자들은 눈시울을 적셨을 것이다. 그리고 비담과 덕만의 사랑을 비극으로 이끈 일등공신은 염종(엄효섭)이라는 사실에 또 한번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다.
염종은 지독한 악인인가?
그러나 염종이 없었다면, 덕만과 비담의 사랑이 순순히 이뤄졌을까? 드라마 <선덕여왕>이 역사적 사실을 기초하고 있음을 떠나, 픽션이든 팩션이든, 그들의 사랑은 물거품이 됐을거란 생각이 든다. 거기엔 '사랑과 권력'을 동시에 쟁취하고자 했던 인간 비담의 욕심이 있다.
다시 말해 '비담의 난'은 염종이 아닌 그 누구가 비담 곁에 있었더라도, 설사 그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없었더라도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바로 인간 내면에 숨겨진 본성, '욕심'이 비담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염종에게서 광대를 보다
<선덕여왕>의 마지막회를 지켜보면서, 머릿속에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리어왕>이 오버랩됐다. 그리고 이를 모태로 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란(亂)>. 그리고 어리석은 왕의 곁에서 조롱과 풍자를 통해 진실을 얘기하는 광대.
비담과 염종의 독대 장면
산탁을 통해 염종의 계략을 뒤늦게 알게 된 비담은 염종을 추궁한다.
"모두 네놈이 꾸민 일이지, 모두!"
이에 염종은,
"넌 그게 문제야. 다 핑계를 대는 거지. 문노를 죽인 것도 나고, 난도 내가 일으킨 거고, 여왕을 위해 칼을 겨눈 것도 나 때문이냐? 넌 결국 삼한지세를 빼앗기 위해 문노를 죽였을거야. 넌 여왕을 차지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했을거야... 왕이 되고 싶은 너야. 다 갖고 싶은 너야."
비극의 모든 원인은 비담에게 있었음을 꼬집는 염종. 이에 그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 부인하는 비담이 있다. 덕만에 대한 연모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비담에게 다시 한번 비수를 꽂는 염종.
"연모가 이뤄지면, 뭐가 달라졌을까? 아니. 넌 그래도 난을 일으켰을 거야. 왜? 불안하니까. 폐하가 널 언제버릴까. 언제 내 쳐질까. 두려우니까. 믿지를 못하니까."
염종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풀리기 시작하는 비담.
"근데 너 그거 알어? 폐하는 너... 끝까지 믿었다... 믿지 못한 것도 너고, 흔들린 것도 너야. 니둘 연모를 망친 건 폐하도 나도 아냐. 그건 바로 너야, 비담!"
염종에게 결정타를 맞은 비담은 칼을 뽑아 그를 응징한다. 그러나 "아니야."라고 부정하며, 되뇌이는 비담의 얼굴속에 진실이 있다. 염종의 말대로 비담의 트라우마와 욕심이 그를 망쳐버린 것이다.
염종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비록 그의 윰흉한 미소속에 비담에 대한 조롱을 품고 있었지만, 비담 본인조차도 속이지 못한 사실. 여기에 미생(정웅인)이 마침표를 찍는다.
리어왕의 어리석음을 일깨운 광대와 같이, 염종의 조롱속에 담았던 진실은 비담의 어리석음을 직시하게 만든다. 물론 덕만과 비담간의 사랑과 신의를 무너뜨린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염종의 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염종이 그렇게 야비하게 입을 놀릴 수 있었던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태생적 트라우마와 권력과 사랑을 모두 이루려는 비담의 욕심에 있었다.
작가가 비담을 통해 시청자에게 얘기하고 싶은 모든 게, 염종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 것이다. 비판이란 건 바보 광대의 입을 빌릴 때 더욱 신랄한 것. 염종이 바보는 아니지만, 유독 <선덕여왕>내에 다른 이들과 비교해 고전적 어투를 버리고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했던 것도. 비담에게 반말투로 지껄여 왔던 것도, 그의 본질적 캐릭터는 드라마상 광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마지막이 더욱 흡입력을 주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같이 비극적인 상황속에 광대 염종과 같은 희극적인 인물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비열한 염종도 알고, 시청자도 아는데, 왜 비담은 몰랐는 지 안타까운 것이다.
결국 선덕여왕의 눈앞에서, 10보 앞에서 '덕만아.'라고 힘없이 내뱉은 비담의 말이, 진실을 깨닫고 한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되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시청자의 눈물속에 잊지 못할 비극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