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및 드라마

중경삼림, 15년만의 조우

바람을가르다 2009. 4. 19. 11:02

<중경삼림, 15년만의 조우>


당신은 <중경삼림>이란 영화를 기억합니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입에 올렸을

그 영화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California Dreaming


내게 묻는다면, OST 라고 답했을 것이다.

양조위와 왕정문의 에피소드에 흐르던 음악.


The Mamas & the Papas - California Dreaming

The Cranberries - Dreams


영화의 내용보다 OST로 사용된 음악이 떠오른다.

적어도 며칠전까지는...


<중경삼림>이 1994년도 작품인지도 몰랐다.

꽤 된 작품인진 알았지만, 벌써 그렇게 됐나 싶었다.

국내에 상영될 당시엔 영화팬들의 이슈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 왕가위감독의 출세작이랄까.

<영웅본색>, <지존무상> 등의 홍콩느와르에서 무협 <동방불패>로

이어진 정형화된 홍콩영화 흥행공식 장르를 깨고 나온 신선한 충격!

왕감독은 이후 <타락천사>,<동사서독>,<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중경삼림>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릴 적 수학공식, 영어단어랑 친해져야 할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비디오로 빌려 봤는데, 그 당시엔 너무 난해했는 지, 영...

분명 이 영화는 다른 영화와 달랐다.

현란하면서도 복잡한 카메라워킹. 시도때도 없는 배우들의 나레이션.

도무지 영화에 집중하기엔, 내가 너무 어려서였을까...

California Dreaming 빼고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굳이 있다면, 출연진과 왕정문이 양조위를 짝사랑했던 거 정도.

이러면 너무 대충 본 티가 나는 건가?


학창시절엔 역시 단순한 게 좋은 거 같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깨고 부순던가, 배꼽잡게 웃기던가.

당시 <중경삼림>은 그냥 시류에 휩쓸려서 본 거다.

매스컴에서 떠드니까. 남들이 봤다니까. 꽤 재밌다니까.

나에겐 이도 저도 아닌 그저 그런 영화였다.

뭔가 새로운 시도 같았는데, 대충 찍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지 영화 전체에 흐르던 음악만이 머릿속에 남았으니.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됐다.

두 번째 보고나서 확실히 알 거 같다.

왜 이 영화가 사랑받았는지.


15년 전 기억속에 드문드문 남아있던 스토리의 빈 사이사이를

차근차근 메꿔가면서 볼 수 있었다.


굉장히 감각적이고, 섬세한 영화구나.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버릴 장면 하나도 없이 잘 짜여진.

귀에 들어오지 않던 그 나레이션에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일상 한 켠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빗대어 노출하는 거 까지.

깨끗하고 모던한 느낌의 영상미. 적당한 유머도 있고.

배경음악이 멋지게 하모니를 이룬다.

전엔 <California Dreaming> 과 <Dreams>만 생각났는데,

다시 보니,

<Dinah Washington - What A Difference A Day Made>

양조위가 스튜디어스와의 사랑을 추억할 때 이 재즈곡이 흐르더라.

물론 예전에 봤을 땐 몰랐다.

그런 곡이 흘렀는지도 몰랐고, 들었어도 무슨 곡인지 몰랐겠지.

다시 보니까 이런 것도 알게 되고.

한 번 본 영화는 다시 보는 성격이 아니라,

이런 잔재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바 안에 주크박스에서 흐르던 음악은 무슨 곡인지 모르겠다.

암튼 왕가위 감독의 곡선정은 뛰어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영화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추천 꾹!

 


15년 전에 첫만남은 낯설어 어색하고 대충 스쳐 지나가는 사이였다.

15년 뒤에 만나서 그 당시에 몰랐던 많은 얘기를 듣게 된 기분이다.

그리고 나서야 <중경삼림>을 이해하게 됐다.


삐삐만 빼면 15년 전 만들어진 영화같지 않다.

09년도 신작 느낌이 난다.

문명의 이기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해가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 더디게 변하는 거 같다.


세상엔 좋은 영화가 많다.

그리고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다.


문득 생각해보건데,

우리도 모르게 가볍게 스쳐 간 사람이

먼훗날, 때론 아주 가까이서 당신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지 모른다는

설레임정도는 품고 살아도 좋지 않을까.

15년만에 한 영화와의 조우를 통해,

잊고 있던 사람, 무관심했던 주변사람까지 한번쯤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