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삼킨 고현정, 연기인생 3막 열다!
올 한해 최고의 드라마를 꼽는다면, MBC<선덕여왕>일 것이다. 시청률과 작품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선덕여왕>이 정상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중에 하나는 덕만공주(이요원)와 각을 이룬 미실 역의 고현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10일 방송분을 통해, 자살을 택함으로써 브라운관은 물론 신라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두명의 여왕을 삼켜버린 미실 고현정.
올해 MBC드라마는 여왕 투톱이 살렸다고 할 수 있다. 수목과 주말에선 힘을 쓰지 못했지만, 월화드라마는 <내조의 여왕>에서 시작되어 <선덕여왕>으로 마무리하는 완벽한 계투가 이어졌다. 연말 연기대상은 타이틀 롤을 맡은 여왕중에 한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여왕 김남주와 이요원은 미실 고현정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고현정은 비록 <선덕여왕>의 타이틀을 이요원에게 내준 셈이 되었으나, 미실은 실질적인 선덕여왕의 에이스로서 승리요건을 갖춘 채, 느긋하게 벤치에서 팀의 경기를 지켜보는 일만 남은 것이다. 지난해와 같이 김명민과 송승헌에게 공동수상으로 악수를 두지 않는 한 MVP는 미실의 몫이 될 것은 자명하다.
2인자가 어울리지 않는 고현정.
<선덕여왕>은 이요원의 복귀작으로 그녀를 위한 드라마였다. <히트>와 <여우야 뭐하니>가 신통치 못한 반응을 이끌자, 고현정은 2인자 미실을 받아드리고 <선덕여왕>에 합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실은 고현정의 카리스마를 폭발시키며 <선덕여왕>이 아닌 <미실전>으로 간판을 바꿔 놓는다. 극의 흐름을 자신에게 돌려놓는 고현정의 힘이 <선덕여왕>을 삼켜버린 것이다.
사실 고현정에게 2인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스코리아 선 출신으로 2인자로서 대중앞에 나섰으나, 오히려 전화위복을 계기가 된다. 진보다 활동 폭이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곧바로 쇼프로 MC로 투입되면서 그녀의 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연이었으나 <여명의 눈동자>의 명지 역으로 첫테이프를 끊은 것도 훌륭했다.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2인자의 꼬리표를 달고 다녔던 것은.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처음 주연을 꿰찬 그녀는, 철없는 발레리나 여대생에서 가난한 작곡가를 사랑하는 연인으로, 혈액암에 걸린 남편(최재성)에게 헌신하는 아내로 극중 연기변신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당시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극후반 화장기없는 맨얼굴을 여과없이 드러내던 그녀의 프로정신은 될 성 부른 나무임을 보여줬다.
첫주연을 맡은 작품부터 홈런을 친 고현정은 이후, <엄마의 바다>, <작별>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최고의 블루칩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귀가시계로 불리던 <모래시계>를 끝으로, 결혼과 함께 대중들에게서 모습을 감춘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를 맛본 뒤 미련없이 떠난 그녀.
그러나 천상연기자인 고현정은 이혼과 함께 다시금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봄날>을 통해 죽지 않은 미모와 살아있는 연기를 보여주며 여왕의 귀환을 알렸다. 이어 스크린에도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마이너라고 볼 수 있는 <해변의 여인>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통해, 국내보단 해외에서 사랑받는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한다. 작가주의 영화를 표방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속에서 고현정이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포장되지 않은 그녀의 연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끄집어내는 그녀를 보면, <해변의 여인>의 문숙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고순이 아닌 고현정을 고현정이 연기한다고 느낄 정도다. <선덕여왕>의 미실속에 고현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속에는 고현정이 은근슬쩍 보인다. 이것은 대중들에게 인식되어 있는 배우 고현정이라는 색깔을, 캐릭터에 따라 농도를 조절하며 넣을 줄 아는 연기 9단의 내공을 의미한다. 덕분에 그녀가 맡은 배역은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히트>와 <여우가 뭐하니>에서 잇따라 쓴잔을 마셨던 고현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실로 완벽하게 부활한 그녀.
“나에 대해서 알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는 알 것 같다. 그녀는 분명 이 시대 최고의 배우라는 점. 타고난 연기자 고현정은 <모래시계> 혜린과 함께 연기인생 1막을 내렸고, <선덕여왕>의 미실로 2막을 끝냈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그녀의 무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