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및 드라마

<일드, 그 두번째 이야기 - 기억에 남는 베스트 드라마>

바람을가르다 2009. 4. 15. 21:59

일드, 그 두번째 이야기.


잊을 수 없는 베스트 드라마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베스트는 철저히 나의 주관과 취향이 개입됨을 미리 밝혀둔다.

그럼에도 많은 일드매니아의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라 본다.

좋은 걸 좋게 받아들이는 가슴은 하나이기 때문이랄까?


일련의 번호는 순위와 무관하며, 그저 떠오르는 순서라고 보면 된다.


1. 립스틱 (Lipstick)

주연 : 미카미 히로시, 히로스에 료코


어찌보면 내 취향에서 가장 끝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일드,

그럼에도 이 작품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힘! 포스!

작가 노지마 신지의 힘이라고 봐도 되겠지.

썰을 풀어내는 솜씨는 감히 국내외를 통틀어 당대 최고라 말해주고 싶다.

노지마 신지의 모든 작품에는 기존의 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철저히

뭉게버리는 힘이 있으며,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겸비한데다

작가의 철학이 담긴 주옥같은 대사가 드라마속 인물의 입을 통해 쏟아진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세계가 대중과 호흡할 수 없었다면

반쪽자리 승부사에 그쳤겠지만, 수많은 대중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겸비한 이 시대 최고의 작가.

 



립스틱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어둡고 무겁다.

등장인물들은 언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고 쓰러질 지 모를 칼끌위에 서 있다.

숨통을 조여오는 건 비단 드라마속에 그들 뿐이랴?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이 들어가는 소년 감별소(우리나라로 치면 소년원?)

마음에 상처를 입은 감별소의 소년소녀들이 사랑과 우정을 쌓아간다는.

교도관 미카미와 소녀 료코의 우정과 사랑도 있고.

이렇게 소개하면 왠지 너무 따뜻해서 거짓말같다.


어린 새들을 어둡고 차가운 새장속에 가둬버리고,

날개잃은 천사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야기가 극 전체를 감싸고 있으니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이기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패자를 양산하며,

가진 자를 위해 사회의 부조리를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작가는 끄집어내 어리고 약하고 순진한 소녀들에게 짐을 하나씩 지운다.

잔인할 정도의 극단적인 설정은 우리의 비뚤어진 가슴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주고픈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보는 내내 행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게 용서가 된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걸 치유하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희망을 발견하고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일드를 보고 눈물이 살짝 맺힌 건 이 드라마가 유일하다.

마지막 장면 마지막 대사는 너무 뇌리에 깊이 남아 잊을 수가 없다.

드라마 보는 내내, 마치 내가 그 교도소 방 한 칸에 머물러 있다가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 한줄기 빛을 보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왕년에 일드 좀 봤다는 사람이라면 거치는 필수코스 <립스틱>

안 보신 분들에겐 꼭 권해주고 싶은 드라마다.


노지마 신지의 작품세계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상당히 아프다.

<성자의 행진>,<인간실격>,<이 세상의 끝에서>,<고교교사>

<성자의 행진>은 <립스틱>과 함께 강추하는 드라마.


인간의 추악한 이면과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비판적인 드라마가 많다.

주인공들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도 절대 작가의 펜으로 돌보지 않는다.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그들을 철저하게 궁지로 몰아넣는다.

마치 우리를 향해 보고 느끼란 듯이. 우리가 저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결국 그들을 돌보는 건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그의 지독한(?) 필력.


지루하지 않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을 지루하지 않게.

긴장감을, 텐션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힘은

노지마신지의 앞에 천재작가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필살기.


그렇다면, 노지마신지는 세상을 어둡게만 보고 있을까?

그의 두 번째 작품을 소개한다.



2. 101번째 프로포즈

주연: 타케다 테츠야, 아사노 아츠코, 에구치 요스케


국내에서도 영화와 드라마로 리메이크 된 드라마.

<101번째 프로포즈>나 <프라이드>와 같은 트렌디성이 강한 작품이

노지마신지의 손끝에서 태어났다는 게, 처음엔 어색할 정도였다.

이런 드라마도 이렇게나 맛깔나게?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 드라마를 과연 추천할 필요가 있을까?

나 역시 일드를 처음에 접할 때,

왜 일드매니아들이 이 드라마를 강추하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이미 리메이크 된 눈에 익은 드라마를.

당연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일드를 접하고 1년이 훌쩍 지나고서, 시간이나 죽여볼까하는 심정으로

딱 1편만 보기로 마음을 먹고. 1편만.

1편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왜 그들이 이 드라마를 그렇게나 추천했는 지.

엄청나게 웃겼다. 스토리를 이미 다 아는 데, 이렇게 웃길 수가 있는가?

기분 좋게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틀만에 11부를 다 봐 버렸다.

원작의 가치가 왜 빛나는 건지, 이 드라마는 확실하게 보여준다.

귀신같이 베끼다 못해 원작보다 뛰어나게 고친 그림도, 작품도

절대 원작이 가진 고유한 빛깔을 낼 수 없다.


스토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단지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 드라마를 보고나서 주인공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선 김희애와 문성근, 드라마에선 박선영과 이문식이 소화했던 주인공.

절대 원작의 커플을 쫓아가지 못한다.

비쥬얼도 연기도 솔직히 발끝에 때만큼도 흉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주인공 아사노아츠코

얼굴에 얼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도도한 여자.

남자주인공 타케다 테츠야의 컨택은 내가 본 드라마 중 최고다.

푹 썩힌 외모에 작은 키, 나이는 좀 많아 보이는가?

정말 못생겼다. 슈렉 뺨친다.

아저씨도 철이 한참 지난 아저씨를 데려다가 주인공 감투를 씌웠다.

그렇다고 저 남자가 개구리 왕자인가? 마법이 풀리면 왕자가 되는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현실속에 인물이다.

 



이 남자가 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말도 안 된다. 정말 말이 안 된다.

불가능한 설정을 비쥬얼에서 확실하게 시청자에게 각인시킨다.

열마디 설명보다 확실한 비쥬얼로 상황을 정리하는 캐스팅에 찬사.

그리고 이 말이 안 되는 얘기를, 말이 되게끔 한올한올 정성스럽게 꿰어간다.


내용을 아는 데 또 볼 필요가 있냐구?

당신이 외롭거나 웃음을 잃어버렸을 때, 속는 셈치고 한번 보시라.

내용을 아는 데, 왜 다음 편이 궁금해서 미칠 거 같은지 알게 된다.


덧붙여, <101번째 프로포즈>와 같은 소재와 내용을 원한다면,

<버스 스톱>을 추가로 추천한다.

전체적으로 두 작품은 굉장히 많이 닮았다.

그래서인지 호평과 악평이 갈린다. 필자는 꽤나 재밌게 봤다.

보너스로 Mr.children 의 “NOT FOUND”가 매회 말미에 흐르는데 죽인다.

이 노래가 <버스스톱>의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데 한몫 단단히 한다.



3. 사랑의 힘

주연 : 츠츠미 신이치, 후카츠 에리


요즘 <내조의 여왕>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거 같다.

국내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설정과 배경이다. 캐릭터도 괜찮고.

 


 

<사랑의 힘>은 사내에서 이뤄지는 내조랄까?

광고업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남자(츠츠미 신이치)가 회사에서 짤린 뒤,

벤처 광고회사를 설립한다. 직원은 두 명.

이후 주인공을 광고회사에서 잘리게 만들고, 자신도 잘린 영업사원이 합류한다.

노처녀 후카츠 에리는 이름을 혼동해 잘못 뽑은 신이치의 눈엔 가시같은 여자다.

에리는 엄청나게 구박받으면서도 절대 회사를 나가지 않는다.

그런 신이치의 독선적이며 차갑고 융통성없는 성격은

후카츠 에리를 만나 그녀의 내조아닌 내조에 힘입어 하나둘씩 고쳐나가고.

거대 광고회사를 상대로 핍박을 이겨내고 다시 비상하는 스토리다.

물론 티격태격하던 두사람의 사랑도 끝내 이뤄지는...


이 얼마나 식상한가? 게다가 2002년도 작품이니...

서른 넘은 노총각과 노처녀가 만나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드라마.

식상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꿈꾸고 있다.

현실에서 우린 사랑과 일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싶어한다.

이 드라마 속에 단순하고 명쾌한 답이 있다.

한꺼번에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사랑이, 사랑을 열심히 하다보면 일이 잘 풀리는 거라고.

한 마리 토끼도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한다.


Oda Kazumasa(小田和正) - キラキラ

드라마의 오프닝으로 흐르던 노래. 어찌나 드라마와 어울리는 지.

제자리에서 힘차게 한 번 뛰어 올라보는 기분이랄까.



4. Long Vacation

주연 : 기무라 다쿠야, 야마구치 토모코


지금은 너무나도 평범한 스토리로 느껴질 지 모르겠다.

연상연하커플, 성격과 직업이 너무 다른 남녀의 동거, 그리고 사랑.

그럼에도 과감히 추천하는 이유는?


기무라 다쿠야(세나)의 색깔이 가장 잘 입혀진 작품이라고 본다.

시크한 남자. 표현이 서툴지만 그래서 귀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가만히 보면 기무라 다쿠야의 작품에서 그의 캐릭터는 거의 비슷하다.

작가들이 그런 기무라의 모습을 염두하고 대본을 쓰는 거 같다.

그래서인지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편이다.

물론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과 같은 드라마에서

그도 연기변신을 하지만, 심각한 그는 그닥 안 어울리는 것 같다.

그가 웃지 않으니 무섭더라.

 


 

여자주인공 야마구치 토모코 (미나미). 사실 이 누님의 연기가 압권이다.

세나보다 네 살 연상으로 나오는데, 푼수덩어리에 털털하고 유머러스한.

세나를 애취급하면서도 정작 미나미 자신이 세나앞에선 애가 된다.

배역을 기가 막히게 소화한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세나의 피아노 연주곡.

결혼식 당일 사라진 신랑을 찾아, 신랑의 룸메이트 세나의 집에 무작정 찾아와

식장에서 토낀 신랑을 기다리겠다며 이삿짐을 푸는 미나미.

그리고 미나미와 세나는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며칠 못가 트러블이 발생하고, 미나미를 쫓아내는 세나.

아차, 그날이 미나미의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세나는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던 피아노곡을 연주하여 미나미의 발길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

(이후에 피아노를 전혀 못 다루는 미나미가 그 곡을 열심히 연습해서, 전공인

피아노를 그만 두려는 세나를 위해 들려주고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


이 피아노 얽힌 명장면을 한국의 모 드라마에서 도용한 걸 보게 되는데.

남의 것으로 감동을 주려한 들 무엇하겠는가?

일본드라마를 표절한 작가가 비단 그 작가뿐이 아니라 자기위안을 삼을 진

모르겠으나, 신인작가도 아닌데 본인 이름에 스스로 먹칠을 해가면서까지..,


<Long vacation>은 지금 본다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트렌디드라마.

웃고 즐기는 데 이만큼 사랑스러운 드라마가 또 있을까?



5. 유스케 산타마리아


마지막으로 하나를 꼽는다는 게 너무 힘들다.

나머지 일드는 다 고만고만하게 재밌게 본 것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엔 거의 본 게 없을 정도라 추천할 수도 없고.

2000년대 초중반에 본 것들 중에 꼽아야 하니 말이다.

<게이조쿠>,<트릭>,<모래그릇>과 같은 추리물을.

<Hero>와 같은 법정물, <GTO>와 같은 학원물을.

<중매결혼>,<뷰티풀라이프>,<이혼남>,<전차남>과 같은 로맨틱드라마?

내겐 다 고만고만하게 재밌다.


확 잡아채는 건, 역시나 위에 거론한 네 편 정도랄까?

<마녀의 조건>이나 <위험한 관계>도 나름 기억에 남고.

<오버타임>이 내용은 좀 후져도 버릴 게 없는 OST 덕분에 기억이 남고.

소개를 시작하면 끝이 없고, 그럼에도 내가 못 본 일드는 너무 많다.

 



고민 끝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유스케 산타마리아로 매듭지으려 한다.

그가 주연으로 대박을 쳤다거나 너무 재밌다거나하는 작품을 꼽긴 힘들지만.

적당한 사랑을 받은 작품들은 꽤 있다.

<중매결혼>, <하나무라 다이스케>, <아르제논에게 꽃다발을>, <웨딩플래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등.

잘 생기지 않았지만, 어리숙한 모습이 남자가 봐도 귀엽다고 해야 되나.

캐릭터는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고, 소심한 남자가 어울리는 배우다.

그럼에도 내가 유스케를 좋아하는 건,

편안한 느낌을 준다.

편안한 기분으로 드라마를 즐기게끔 만드는 배우랄까?

시간이 지나도 유스케 산타마리아의 작품은 왠만하면 챙겨보려 한다.

좋아하는 배우가 한 명쯤 있다면 일드여행에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