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가는길, 드라마판 삼시세끼?
TV를 보는 시청자는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드라마든 예능이든 ‘속도’가 참 중요하다. 위기를 부르는 사건이 빨리 터지고, 등장인물이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 치열할수록 시청자는 흥미로워한다. 때문에 인물이 위기의 상황을 대처하면서 느끼는 감정보다는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가에 초점이 맞춰지기 쉽다.
예능에서 나영석PD 미다스손으로 불린다. 매번 기대이상의, 대박 예능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삼시세끼’는 예상외에(?) 성공을 거둔 나영석PD의 대표프로그램이다. ‘삼시세끼’는 그의 전작 ‘1박2일’과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속내를 보면 전혀 다르다. ‘1박2일’은 빠르고 치열하다.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미션이 주어지고, 여행지로 가는 차안에서 조차 강호동을 비롯한 출연진들은 미션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출연자들끼리 눈치를 보고 경쟁을 하고 훼방도 주저하지 않는다. 미션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출연진에게서 치열함이 느껴진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제작진은 출연진에게 쉽게 식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복불복이 기다린다. 다시 게임으로 들어간다. 잠자리조차 복불복으로 정해진다.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서까지 출연진은 게임이든 뭐든 제작진이 시키는 걸 해야한다. 그렇게 열심히 미션을 하고 복불복을 해도 시청자의 만족도에 따라 매회 평가는 달라진다.
반면 ‘삼시세끼’는 한가하다. 게임이고 뭐고 없다. 이서진, 차승원 등 출연진들이 알아서 밥만 해먹으면 된다. 밥 해먹고 쉬고 밥 해먹고 쉰다. 밥 때마다 끼니만 해결하면 끝나는 프로그램이다. 속도, 치열함과는 거리가 먼. 어떻게 보면 참 심심한. 그래서 ‘삼시세끼’가 처음 방송됐을 때, 평가는 엇갈렸고 성공여부는 매우 불투명했다. 심지어 출연자인 이서진조차 나영석PD에게 대놓고 ‘망할 거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시청자들은 ‘삼시세끼’에 호감을 보였다. 회를 거듭할수록 ‘삼시세끼’가 보여주는 소박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거의 모든 예능이 ‘빨리빨리’를 외칠 때, 나영석PD가 내놓은 ‘느림의 미학’ 삼시세끼는 신선함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드라마는 어떤가. 역시나 드라마도 속도는 강조된다. 특히 주중에 방송되는 미니시리즈의 경우, 4회안에 시청자의 선택, 성공여부가 결정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드라마를 제작하는 입장에선 4회안에 승부를 보기 위해 시청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흥밋거리는 최대한 쏟아 붓는다. 정해진 시간내에 많은 걸 보여주려다 보니, 전개속도는 당연히 빠를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막장드라마도 스피드가 대세였겠는가. 대표적으로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는 ‘스피드 막장’이란 신개념 드라마를 선보이며 시청자를 사로잡았고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그런데 이런 트렌드를 벗어난 드라마가 최근 방송되고 있다. 바로 이상윤-김하늘 주연의 KBS2 새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이 그렇다. 드라마는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를 겪는 두 남녀를 통해 공감과 위로, 궁극의 사랑을 보여줄 감성멜로를 표방한다. ‘감성’ 멜로라 그런가. 2회를 마친 지금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잔잔하다. 미니시리즈의 4회까지를 속도전쟁에 비유한다면, ‘공항가는길’에서 그 말이 무색해진다.
보통 멜로드라마의 초반이라면, 주인공이든, 주인공과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든 뭔가 치명적인, 격정적인, 그래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일 수 있는 장면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경우가 허다한데, ‘공항가는길’에선 그 흔한 연애 장면조차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김하늘이든, 이상윤이든, 최여진이든 극중에서 샤워조차 하지 않는다. ‘함부로 애틋하게’의 극중 시한부 김우빈조차 탄탄한 복근을 보여주며 몸홍보(?)를 했던 것과는 사뭇 비교된다. 아픈 사람조차 드라마의 시청률을 위해 벗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속도인데, ‘공항가는길’에 대해 호평하는 시청자의 다수가 ‘잔잔해서 좋다.’고들 한다. ‘잔잔해서 좋다?’ 드라마가 초반임에도 치열한 게 아니라 잔잔한데 좋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 바로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드라마의 초반은 사건에 포인트를 맞춘다. 사건이 진행되는 속도.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그래서 제작진은 사건을 대처하는 인물의 ‘감정’보다는, 사건을 풀어가는 ‘방법’에 더 비중을 둔다. 당연히 시청자는 제작진의 방향을 쫓을 수밖에 없다.
즉 일반적인 드라마의 패턴에 익숙한 시청자에게 ‘공항가는길’은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셈이다.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변화에 좀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전개가 잔잔하고, 때론 더디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디테일하게 그려지는 주요 인물들의 감정선을 쫓아가다보면 어느새 아쉽게도 드라마가 끝나있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감정과잉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딸 애니(박서연)의 죽음을 대하는 서도우(이상윤)의 절제된 표현이 그렇다. 보통 드라마라면, 특히 드라마의 초반이라면 서도우가 오열하는 모습이 익숙할 법하다. 그러나 ‘공항가는길’의 제작진은 오열대신 서도우가 애니가 쓰던 침대에 누워 닿지 않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는다던지, 예고없이 멈춘 한강에서 애니의 유골 한줌을 뿌리는 서도우의 뒷모습, 흐느낌을 차안에서 지켜보는 최수아(김하늘)를 통해 슬픔을 극대화한다. 그렇게 절제된 표현으로 오히려 감정변화를 극대화시키는 데 탁월하다. 영상미는 어떤가. 상당히 감각적이고 섬세하다. 중간중간 드라마가 아니라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김철규PD의 역량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드라마의 소재는 불륜이냐 아니냐의 경계에 서 있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불륜논란이 ‘공항가는길’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미니시리즈가 추구하는 패턴에서 벗어난 제작진의 방향성은 신선하다. 이를 받치는 퀄리티도 매우 뛰어나다. 김하늘, 이상윤 등 배우들의 연기도 안정감을 준다. 제작진이 시청률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처럼 서두르지 않고 1,2회에서 보여준 역량을 마지막회까지 유지한다면 충분히 좋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