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부탁해, 자존심마저 버린 남자들?
요즘 개그콘서트에 ‘핵존심’이란 코너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핵존심’은 사나이의 자존심, 남자의 자존심을 풍자한 코너다. 방송에선 남자에게 있어 ‘자존심’이란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 때론 억지를 부려서라도 지키고 싶은 어떤 것으로 곧잘 묘사된다. 물론 코미디프로그램의 특성상 꽤나 과장된 측면도 없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에 웃음도 쉽게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10일 방송된 일요일이 좋다 ‘아빠를 부탁해’에선 개콘의 ‘핵존심’과는 다르게, 자존심을 버린 남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경규-강석우-조재현-조민기 네명의 아빠들이 그렇다.
이경규는 딸 이예림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네일샵도 가고 멕시칸 레스토랑도 갔다. 이경규에겐 네일샵도, 멕시칸 레스토랑도 낯선 장소다. 게다가 처음 보는 예림이 친구들까지. 이경규에겐 모든 게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동행했고 딸과 딸 친구들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었다. 딸 친구들이 하는 짓궂은 질문도 받아줬고, 낯간지러운 게임도 동참했다. 도대체 왜?
일단 ‘아빠를 부탁해’란 방송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딸의 친구들과 예능 분량을 뽑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게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림이 친구들은 이경규와 예능 분량 뽑는 솜씨가 상당하다. 하지만 방송을 떠나 아빠의 입장에서 이경규는 또 다르다. 내 딸이 어떤 친구들과 사귀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좋은 친구들이란 느낌이 왔을 때 아빠는 안도할 수 있다. 만족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림이의 친구들을 통해서 이경규는 딸을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그것이 예림이 친구들의 짓궂은 농담에도, 적극적인 요구사항에도 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아빠 이경규에게선 남자의 자존심을 읽을 수 없다. 자존심을 버리고 네일샵도 가고, 젊은 애들사이에서 게임도 한다. 어색하고 쑥스러워도 참는다. 딸의 친구들을 통해 딸을 좀 더 알기 위해서라도.
조재현은 어떤가. 배우지망생이지만 매번 오디션에 떨어지는 딸 조혜정을 본다. 혜정이는 아빠한테 말한다. 오디션에 떨어졌을 때처럼 힘들 때면 한강을 종종 찾아왔다고. 조재현은 그런 딸에게 자신이 오디션을 봤던 시절을 얘기해줬다. 감독님에게 캐스팅을 부탁하기 위해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갔다가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던 일화도 들려줬다.
연기파 배우 조재현에게 그런 과거가 있음을 아는 시청자는 별로 없다. 조재현입장에서 굳이 방송에서 들추고 싶은 얘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딸에게도 말이다. 상처를 받았던, 자존심이 상할 만했던 과거였기에. 하지만 조재현은 딸에게 들려줬다. 오직 본인 스스로의 노력만이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지름길임을 배우지망생 딸 조혜정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배우 조재현의 자존심은 잊는다.
그리고 아빠 강석우. 강석우는 방송을 통해 하기 힘든 반성을 했다. ‘아빠를 부탁해’속에 비춰진 자신과 딸 강다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시청자의 반응을 읽은 듯 했다. 아빠와 딸이 함께 했을 때, 아빠 강석우가 느끼는 만족도와 딸 강다은이 느끼는 만족도가 당연히 다를 수 있다. 그것을 문제가 있는 아빠라고 단정할 순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강석우는 시청자가 보기에 불편했다면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란 유연한 사고를 했다. 이에 딸 강다은도 솔직한 속내를 비췄다. 아빠를 존경은 하되 어려워한 이유에 대해서. 덕분에 부녀관계가 좀 더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빠를 부탁해’를 통해 조재현-조혜정 이상가는 의미있는 변화가 강석우-강다은 부녀에게 옮겨진 인상을 받았다.
사실 시청자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얘기까지 신경써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껏 강석우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자식과의 관계, 집안의 분위기를 설계한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체계, 라이프스타일이 익숙하고 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생판모르는 남,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고, 변화를 모색한다는 게 어떤 면에선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빠 강석우는 유연한 사고를 했고 용단을 내린 격이다.
제작진으로부터 딸 조윤경의 영상편지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부터 훔친 조민기는 어떤가. 남자의 자존심은 찾을 수 없다. ‘아빠를 부탁해’에 대표 수도꼭지 아빠가 조민기다. 조민기가 ‘아빠와 남자는 다르다’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렇게 자식앞에서 아빠는 남자를 버린다. 그깟 자존심따위가 뭐라고 된다. 그런데 재밌다. 훈훈하다. 자존심을 버린 남자가, 그런 아빠가 멋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