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부모들이 변했다
철없는 부모가 뜬다?
최근 MBC주말드라마 <보석비빔밥>의 상승세가 무섭다. 여기에는 <인어아가씨>, <하늘이시여>등을 히트시킨 막장의 대가
마치 청문회를 방불케하며 부모의 잘못을 요목조목 밝혀낸 뒤, 부모와의 별거라는 그럴듯한 명제아래 쿠데타에 성공한다. 성인이 된 자식들의 눈에 모자라고 부족한 부모들도 나름의 항변을 해보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결국 이빨빠진 호랑이 부부는 집에서 내쫓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버린다.
비단 <보석비빔밥>뿐이 아니다. 같은 시간에 경쟁하는 <그대웃어요>에서 서정인(
과정이야 어쨌든 낳아주고 길러 준 부모에게, 발칙하기 짝이 없는 자식들의 반란을 시청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지 않았을까. 드라마가 픽션이라해도 투명이든 불투명이든 현실이라는 거울을 외면할 순 없다. 시청자가 공감할 수 없는 드라마는 TV라는 매체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부모들은 변했다.
사실, 80년대만해도 드라마상에 비춰진 대한민국 대표 부모는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아빠
그러나 90년대이후 트렌디드라마가 쏟아지면서 부모는 허영심과 이기심의 주체로 돌변한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배우자의 조건을 따지며, 남녀주인공 사이를 갈라놓는 악역으로 나타난다. 부모는 자식에게 훼방꾼이자 장애물이 된다. 권위적이었으나 따뜻함이 베어있던 전통적인 부모들은 쇠퇴하고, 차갑고 계산적인 부모들의 노출이 잦아진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특히 막장드라마가 가장 선호하는 부모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기가 바뀌면서 부모는 또 다시 변신을 시도한다. 바로 자식들의 짐이 되는 것. 악한 이미지를 벗는 대신 무능함을 드러낸다. 기존의 오빠, 동생대신 사고치는 인물은 부모가 되고, 철면피에 개념까지 놔버린다. 철저하게 부모의 몫이었던 희생은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나쁜 것보다 무서운 무능함으로 드라마 안에서 존재이유를 찾는다.
전통적인 캔디나 신데렐라가 사라지며, 보다 영악하고 자기 표현을 숨기지 않는 업그레이드된 캔디가 등장하듯, 부모들도 변해야 드라마에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부모는 드라마 속에 캐릭터이며 극의 활력소가 될 뿐 아니라, 주인공들이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드라마를 반듯하게 쌓아올릴 수 있게 만드는 무게 추의 역할을 한다. 단순히 부모라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한 평면적인 인물은 지루함과 식상함을 동반하지만,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는 입체적인 인물에는 역동성이 부여된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일종의 간접체험을 하는 도구이다. 드라마가 주는 효과는 눈에 보이지 않게 시청자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종종 드라마를 일반화하는 경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도덕적 기준대신 내 주변의 이야기나 혹은 드라마상에 인물 및 상황을 떠올릴 수 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가 뿔났다>의
“부모라고 해준 게 뭐가 있나?”식으로, 부모의 치부를 꾸짖는 <보석비빔밥>의 자식들을 바라보며 당연한 분위기로 받아들인다면, 드라마라해도 분명 문제의 소지를 남기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물론 뜬금없게 느껴지지 않으며,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부모들에게 옐로우카드를 내민 듯한 극의 내용은 일부 공감을 사더라도, 반대편에선 불쾌함내지 박탈감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물론 갈등없는 드라마는 없고, 결국 궁극적인 화해를 위한 사전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없고 무능한 부모들이 드라마에 자주 노출되는 것이 반갑지 않은 이유는, 부모와 자식간에 신뢰의 벽을 흔드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세대갈등이 표면화된 요즘 세태에 TV에서까지 갈등을 부추기는 것 같아 씁쓸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