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전성시대? 제대로 된 악녀가 없다!
올해 안방극장은 악녀가 접수중이다. 국민악녀 ‘야왕’ 주다해(수애)를 필두로, 연기력논란을 악녀변신으로 날려버린 ‘장옥정, 사랑에 살다’ 장희빈(김태희), 어설픈 어장관리로 본전도 못 건진 채 기억상실증이란 쇼까지 해가며 초라한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남자가 사랑할 때’ 서미도(신세경). 초등학생 반아이들을 강하게 몰아세울 ‘여왕의교실’ 마녀선생 마여진(고현정)까지. 최근 드라마 여주인공은 여린 천사표를 벗어던지고 독한 악녀표로 갈아입는 횟수가 늘고 있다. 그야말로 악녀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드라마에서 악녀가 없었던 건 아니다. 거의 모든 드라마에 악녀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악녀는 드라마 속 여자주인공을 괴롭히는 서브녀에 속했다. 예를 들어, 여자주인공에게 반한 남자주인공을 뺏어오기 위해 중상모략을 멈추지 않는 콤플렉스덩어리로 ‘남자가 사랑할 때’ 백성주(채정안)같이 사이드에서 칼가는 여자, ‘백년의유산’ 방영자(박원숙)처럼 착한며느리 민채원(유진)을 괴롭히는 못된 시어머니나 계모처럼 속물에 나잇값 못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주인공 스스로가 악녀를 자처한다. 당하기 싫다는 것이다. 인내는 선이 아니며, 울고 앉아서 남자주인공의 어시스트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네가 감히 나를 쳤어?’ 이제는 머리채를 잡겠다는 것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자로, 절대 손해를 보며 살지 않겠다는 21세기형 여주인공으로 악녀컬러를 살짝 입혀 진화중인 것이다. 그렇다. 이제 안방극장에서 여주인공의 악녀화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고,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중심이 되었다.
막말로 드라마 남자주인공은 나쁜남자가 대세인데, 여자주인공도 악녀중심으로 개편해 평등사회 앞당기는 모범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여자주인공의 악녀변신에 시청자는 여전히 거부감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거부감의 중심엔, 드라마의 개연성을 무시한 채, 오직 ‘악녀’의 개성과 매력에 의존하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자리한다.
‘이유있는 악녀, 공감할 수 있는 악녀를 보여드리겠다.’ 야왕에서 주다해 역할을 맡은 수애가 드라마 방영전에 인터뷰 한 내용이다. 그러나 야왕이 종영한 현재까지도, 시청자는 주다해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이유있는 악녀가 아닌, 싸이코수준의 미친 여자쯤으로 받아들였다. 야왕은 시청률에선 성공했지만, 막장드라마라는 일관된 시선을 끝내 불식시키지 못했다. 이유는 주다해가 악녀되는 과정이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주다해는 무시무시한 악행을 끊임없이 저지르는데, 그에 따른 이유들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LTE급 이유불문 극전개로, 하류의 복수는 지루하게 미뤄지고, 오직 주다해가 언빌리러블 악행을 저지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집중됐다.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장희빈은 어떤가. 초반 장희빈이 악녀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음에도 산만하고 어설픈 극전개로 재미와 몰입도를 떨어뜨렸다. 때문에 패션디자이너는 뭐고, 착한 장희빈은 웬 말이냐는 불편한 목소리도 높아졌다. 여기에 김태희의 연기력논란까지 불거지며, 시청자는 드라마 ‘장옥정’속 장희빈이 ‘원래는 착했었다?’라는 새로운 시각에 눈길을 주지도, 공감하려 들지도 않았다. 최근 장희빈이 본격 악녀로 변신하고, 김태희가 제옷같은 악녀연기를 보여주자, 이제서야 반응이 오고 있는 형국이다.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때’ 서미도는 악녀가 아니었다. 양다리를 걸친다고 다 악녀라고 일반화시키면, 그동안 드라마 속 삼각관계에 놓였던 여자주인공은 모두 악녀였는가. 즉 서미도가 한태상(송승헌)과 이재희(연우진)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건, 적당한 이해를 동반한다. 문제는 서미도가 이재희와 약혼자 한태상집에서 19금 정사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 장면 하나로 서미도의 캐릭터는 망가졌다. 나가도 너무 나갔다. 여주인공으로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이제는 뭘해도 밉상이 됐다. 악녀가 아니었음에도, 악녀 오브 악녀로 낙인찍혔다.
‘야왕 주다해-장옥정 장희빈-남사 서미도’의 공통점은, 여자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언행이 시청자를 이해시키는 데 실패한 케이스란 점이다. 그만큼 악녀로 비칠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캐릭터가,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시청자의 공감을 사도록 개연성을 부여시키며 전개하지 못한 제작진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악녀라는 캐릭터가 최소한의 공감이라도 얻기 위해선, 사실 캔디와 같은 천사표캐릭터보다 훨씬 세심하게 공을 들여야 한다. 분량이 많은 여자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주다해처럼 캐릭터의 개연성을 부여할 시간마저 쪼개 악행에 투자하거나, 숙종(유아인)을 향한 장옥정의 애틋한 사랑을 지루하고 뻔하게, 공감할 수 없게 그려서 착한 장희빈 분량을 쓸모없게 만들면 악녀주인공은 길을 잃는다. 또 어장관리를 했는지도 오락가락한 서미도처럼 캐릭터가 변하는 과정이 세심하지 못하고 불분명할 때엔, 극초반 힘들게 쌓아올린 매력마저 한방에 골로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자주인공 악녀가 남자주인공 나쁜남자처럼 공감받는 경우도 있었나. 시청률제조기 김수현작가가 대단한 또 하나의 이유가 공감할 수 있는 악녀를 잘 그린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청춘의덫’에서 남편(이종원)의 배신에 복수를 꿈꾼 심은하가 대표적으로 잘 빠진 악녀다. 심은하의 ‘부숴버릴거야.’에 누가 그녀를 악녀로 보았나. 모두가 통쾌해했다. ‘내남자의여자’의 김희애는 어떤가. 친구 배종옥의 남편을 뺏은 아주 질 나쁜 여자로 김희애가 등장한다. 하지만 김희애가 여주인공이라고 불필요하게 친구 남편을 뺏어야만 하는 작위적인 운명따위의 과거를 부여하고 집착하기 보단, 불륜을 저지르고도 당당한 그녀의 언행과 심리에 포인트를 맞추고 일관된 전개를 하니, 캐릭터나 드라마가 쿨하게 빠진다. 착한 장희빈 '장옥정'과 대비되는 측면이다.
요즘 안방은 악녀의 유혹에 빠졌다. 악녀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도 없다. 때문에 과거와 달리, 악녀포지션에 과감하게 여자주인공을 매칭하고 있다. 하지만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제대로 된 악녀가 없다. 뚜렷한 주관과 능동적인 태도가 매력으로 작용하는 악녀가, 여주인공이란 포지션에 역으로 발이 묶여 정체성없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캐릭터가 불분명하니 매력마저 반감된다. 극전체를 관통하는 연속된 상황속에서, 기획의도과 스토리에 부합하는 캐릭터의 일관성과 개연성이 우선되지 않고 자극적인 설정으로 악녀를 치장하기 급급하다보니, 드라마는 어느새 막장으로 치닫는다. 무턱대고 악녀캐릭터를 소비하는 양상이다. ‘무엇을’ 해야 악녀가 될 수 있을까보단, ‘왜’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나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