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사랑에 살다, ‘숙종 유아인’ 조선판 재벌2세?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은 재벌2세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부모가 정해준 또 다른 재벌가의 여자와 정략결혼을 준비한다. 승계 받을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혹은 회사를 키우기 위해 등등. 하지만 사랑없는 정략결혼에 남자주인공은 거리를 두고 반감을 느낀다. 그 와중에 남자는 회사 말단 여직원과 우연한 만남이 잦아진다. 그녀만의 건방짐(?)따위 등 독특한 매력을 발견한다. 사랑을 느낀다. 자신이 결혼을 한다면 그녀와 하고 싶다.
그래서 남자주인공은 정략결혼을 거부한다. 부모는 아들과 만나는 여직원의 실체를 알게 된다. 우리 회사 말단 여직원, 평범한 집안의 여자임을 알고 경악한다. 남자의 어머니가 출동한다. 여자를 만난 자리에서 다짜고짜 얼굴에 물을 뿌리거나 따귀를 갈긴다. “너 같은 게 내 아들을 감히? 어쩌구 저쩌구...” 돈봉투 하나 툭 던지며,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다시는 내 아들앞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남자를 포기할 생각도 하지만, 이미 여자도 남자를 사랑하기에 쉽지 않다. 남자는 여자에게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한다.
드라마에서 재벌2세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가난한 여주인공의 신데렐라스토리가 대강 이러한 코스를 밟는다.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도 이와 유사한 흐름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에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자 정략결혼도 마다 않는 숙종 이순(유아인). 하지만 그도 침방나인으로 궁에 입성한 장옥정(김태희)과 사랑에 빠지면서 내면의 갈등을 빚는다. 권력이냐, 사랑이냐.
한편 서인의 실세 민유중(이효정)의 여식 인현(홍수현)과 국혼을 바라던 대비김씨(김선경)는, 아들 숙종이 궁녀 장옥정과 사랑에 빠졌음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결국 장옥정을 구하려다 부상까지 입은 아들을 대신해 국혼을 진행했고, 장옥정에겐 씻기 힘든 수모를 안기며 궁에서 내쫓았다. 여기에 결정타로 민유중이 나서서 장옥정을 납치해, 불태워 죽이도록 지시했다.
패션 스승(윤유선)이 화재로 죽어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한 장옥정은 죽다 살아나 결심한다. 자신을 천한 신분이라고 무시하고 음해하고 수모를 안긴 자들을, 발아래로 놓고 부숴버리겠다고. 비록 중전의 자리는 인현왕후에게 내주고 말았지만, 숙종의 빈이 되어 훗날 도모하겠다고. 복수를 다짐한 장옥정은 무섭게 돌변했다. 조선의 패션왕을 꿈꾸던 착한 캔디 장옥정은 보이지 않았고, 야왕을 꿈꾸는 악녀 주다해가 보였다. 거침없는 돌직구, 표독스런 눈빛은 김태희표 장희빈의 시작을 알렸다.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사극이지만 현대극 인상을 준다. 재벌2세와 신입디자이너의 사랑이야기. 지금껏 드라마 장옥정은 신데렐라스토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요즘 트렌드는 정형화된 신데렐라스토리가 잘 먹히지 않는다. 대중은 유리구두만 벗어 던지고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보단, 직접 구두를 찾아나서는 신데렐라를 기대한다. 때문에 장옥정 김태희도 구두를 찾아 나선 셈이다. 주다해스런 독한 마음을 품고서.
그렇다면 드라마 장옥정에서 재벌2세 숙종은 어떻게 변했을까. 큰 틀에서 보면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는 신분따위에 상관없이 오직 장옥정만을 사랑한다. 또한 ‘장옥정 사랑에 살다’ 10회에선, 권력과 사랑중에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동평군 이항(이상엽)의 질문에, 숙종은 곤룡포을 벗어던지고 장옥정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몸소 보여줬다. 모든 걸 벗어 던진 숙종은 장옥정과 뜨거운 하룻밤을 보냈다. 권력보다 사랑에 고픈 남자임을 각인시켰다.
다만 정략결혼을 물리치는 드라마 속 재벌2세와 달리, 숙종 이순은 인경왕후에 이어, 인현왕후와도 정략결혼을 진행한다. 때문에 장옥정을 향한 숙종의 사랑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역사가 부른 딜레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일 역사극이 아닌 현대극으로 옮겨왔을 때, 재벌2세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회사를 위해 불가피하게 정략결혼을 선택한다면, 아무리 재벌2세의 사랑이 고귀하더라도 그의 매력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숙종이 장옥정을 빈으로 받아들이고, 그녀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자체가 가져올 재미는 향후 큰 기대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결구도, 김태희와 홍수현의 피튀기는 설전과 계략, 경쟁이 얼마나 신선하고 짜릿하게 전개될 것인가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여기에 동이 숙빈 최씨(한승연)는 어떤 모습으로 녹아들 것인가.
조선판 재벌2세 숙종의 사랑은 한계가 명확한 절반의 성공에 가깝다. 일시적으로 벗어던진 곤룡포는 다시금 입어야 하는, 역사적 사실은, 왕의 신분은 사랑만으로는 완전히 벗겨낼 수 없다. 아무리 장옥정과의 합방신이 잦아지고 애틋함을 더한다고 해도, 그들의 사랑은 궁중암투가 가져올 카타르시스보다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존 캐릭터보다 강해진 유아인표 숙종의 정치적 행보와 맞물려, 장희빈-인현왕후-숙빈최씨의 여인천하가 기대감을 낳는다. 장희빈 김태희의 악녀연기는 어떨지, 홍수현의 인현왕후 캐릭터는 얼마나 색다를지, 걸그룹 카라의 한승연은 연기력논란을 피할 수 있을지, 본격적으로 부딪히게 될 장옥정 속 여인들의 변화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