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 슬픈 사랑할 것 같은 남자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니카세트와 CD플레이어의 보급율이 높아지고 음반시장의 파이가 커진다.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90년대엔, 젊은 가수들을 중심으로 수십만장씩 팔려나간 앨범들은 수두룩했고, 문화대통령 서태지를 비롯, 신승훈, 김건모, GOD, HOT 등 단일 앨범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일도 빈번하게 출현한다. 댄스와 발라드에 편중됐던 장르는 락과 힙합 등으로 스펙트럼을 넓혀 가고, X세대를 중심으로 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 기획사는 젊은 신인가수 발굴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 붙인다.
반면 88년 신해철과 공일오비를 낳은 <무한궤도> 이후, 젊은 피의 수혈 창구역할을 맡아오던 <대학가요제>는 이렇다 할 스타를 배출하지 못한 채 조금씩 수면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물론 중간에 ‘너를 사랑하고도’로 잘 알려진 전유나를 배출하기도 했으나 파괴력은 미미했다.
여기에는 음반시장의 파이가 커진 것과 무관치 않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음반시장을 눈앞에 두고 기획사는 더 이상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대학가요제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젊은 가수들을 직접 발굴하고 기획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가수를 지망하는 연습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93년도에 대학가요제의 체면을 세워 주는 걸출한 남성듀오가 나타난다. 바로 ‘꿈속에서’로 대상을 받은 김동률과 서동욱의 <전람회>가 그들이다. 특히 김동률은 90년대 대중음악을 이끈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다.
김동률의 재능을 알아 본 신해철은 전람회 1집부터 직접 제작을 맡아 후원한다. 당시 힙합과 댄스음악이 주를 이루던 가요계에, 전람회의 첫 앨범은 타이틀 곡 ‘기억의 습작’을 비롯, ‘하늘높이’, ‘세상의 문앞에서’, ‘향수’ 등 주옥 같은 곡들로 채워져 마스터피스로 손색이 없다. 재즈를 바탕으로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그의 음악은 당시 힙합과 댄스음악이 주를 이루던 가요계에 잔잔한 울림을 가져온다.
사랑을 고백할 때 가장 많이 선호하는 곡중에 하나인 ‘취중진담’이 실린 전람회의 2집은 ‘이방인’, ‘고해소에서’ 등으로 세련미를 더하지만 1집의 그늘을 벗지 못한다. 결국 ‘졸업’이 담긴 3집으로 김동률과 서동욱은 전람회을 마친다.
이어 김동률은 ‘패닉’의 이적과 의기투합, <카니발>이란 이름으로 프로젝트 앨범을 내놓는다. 진한 향수가 묻어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 타이틀 곡 ‘그땐 그랬지’에 비해, 덜 알려졌던 ‘거위의 꿈’은 훗날 인순이가 리메이크 해 대박을 터트린다. 많은 이들이 카니발이 아닌 인순이의 곡으로 착각할 정도로, 이제는 인순이의 대표곡이 되버렸다.
김동률의 곡들은 다른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된 사례가 적지 않은데, 대표적으로 김장훈의 ‘쇼’. 이 곡은 원래 김동률이 김원준에게 주어 히트친 곡이다. 또한 장혜진에게 주었던 ‘1994년 어느 늦은 밤’과 김동률 3집 수록곡 ‘사랑한다는 말’을 이은미가, ‘취중진담’의 박효신, 이승환에게 주었던 ‘천일동안’은 린과 케이윌(K.will)이 리메이크를 한다. 이밖에도 클릭비, 김범수, 포지션 등이 그의 곡을 다시 부르는데, 이를 두고 김동률은 아무리 리메이크가 합법적이라해도 작곡가에게 사전양해없이 가져다 부른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속상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인순이만이 유일하게 김동률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동률은 솔로로 전향한 뒤,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의 의존도를 줄인다. 기존에 전람회나 이승환의 ‘천일동안’과 같은 곡에서 보여주었던 현악을 곁들인 편곡과 스트링 기법 위주로 삼았던 클래식한 톤을 살짝 벗는 대신, 서정적인 멜로디를 바탕으로 보다 가볍고 소탈한 느낌에 집중한다. 김동률이 5집 앨범을 내놓는 동안 히트한 곡들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한 성향을 알 수 있는데, ‘사랑한다는 말’,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다시 시작해 보자’ 등은 전형적인 김동률 색깔이 묻어나지만, 예전보다 옅어진 느낌이 번져 있다. 이밖에도 알렉스가 <우결>에서 불러 화제가 된 ‘아이처럼’, 이소은과 듀엣을 이룬 ‘기적’, 양파와 함께 한 ‘벽’ 등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곡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률은 한번 듣고 버려지는 가볍고 쉬운 대중음악의 홍수속에, 솔직 담백한 가사와 섬세하면서도 중량감이 돋보이는 곡들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아티스트였다. 문득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김동률은 목소리가 슬퍼서 슬픈 사랑을 했을 것 같은 남자라고... 그보단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알 것 같은 남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