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왕, 망가진 복수vs불타는 멜로
‘복수’를 다룬 드라마의 정석은 무엇일까. 권투에 비유하면, 복수의 대상은 세계챔피언이고 복수하고자 하는 주인공은 무명복서로, 피할 수 없는 사각의 링에서 목숨 걸고 펼치는 승부가 떠오른다. 관중 누구도 무명복서가 세계챔피언을 때려눕힐 거라 예상하지 못했으나, 매 라운드 얻어터지고 수차례 다운을 당하고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는 무명복서의 끈질긴 투혼에 세계챔피언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관중은 무명복서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복수드라마를 간단하게 비유하면, ‘세계챔피언vs무명복서'의 대결이다. 복수를 다룬 월화드라마 ’야왕‘의 시청자가 바라는 큰 틀에서의 전개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악녀 세계챔피언 주다해(수애)에 맞서,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하류(권상우)라는 평범한 남자의 악전고투. 그리고 복수를 갈망하며 준비와 노력,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
그동안 드라마 야왕은 이러한 공식에 충실했다. 링에 오르자마자, 하류는 주다해에게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남편 하류가 호스트바에서 몸과 눈물을 팔았던 돈으로, 아내 주다해는 백학그룹 후계자 백도훈(정윤호)과 유학생활을 엔조이했다. 그 사실을 알고 하류는 그로기상태로 몰렸다. 하지만 딸 은별의 죽음으로 하류는 일어섰다. 피를 토하고 눈물을 쏟고도, 하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동시에 죽었던 눈빛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류의 솜망방이 주먹에 비해, 돌주먹 주다해의 펀치는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때문에 하류의 트레이너 엄삼도(성지루)는 얘기한다. 잔타로는 승부가 안 되니, 한방에 결정지어야 된다. 주다해의 결정적 약점을 찾아서 한방에 온 힘을 다해 제대로 주먹을 날리라고. 그래서 하류는 주다해의 약점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주다해에게 얻어 맞으면서 찾는 수밖에 없다.
무명복서가 세계챔피언을 때려눕히는 일은 그만큼 힘든 것이다. 드라마 ‘야왕’은 총 24부작중 14회를 마쳤다. 아직은 하류가 주다해에게 얻어터지는 게 맞다. 심판의 눈을 피해 주다해의 악랄한 반칙도 종종 나타나는. 다만 14회라면 하류가 주다해에게 얻어맞으면서도 간간히 날카로운 잽을 던지며, 상대에게 서늘한 긴장감을 주는 과정도 동반돼야 한다. 그런데 야왕 14회가 보여준 건, 지켜보던 관중이 하나둘씩 빠져 나갈 정도로 맥빠지는 내용이 눈에 띄게 많았다.
대표적으로 드라마가 가장 경계해야 할 ‘엿보기&엿듣기’의 식상함과 허술함이다. 실제 야왕 14회는 엿보기에서 시작해서 엿보기로 끝났다. 백창학(이덕화)회장의 물에 독(부동액)을 탄 범인은, 주다해(수애)도 백도경(김성령)도 아닌 백지미(차화연)였다. 백지미가 부동액을 타는 장면이 가정부의 엿보기에 걸렸다. 독극물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백지미에게 출동을 명령받은 주다해가 가정부를 먼저 만났고, 한발 늦게 가정부의 집을 찾은 하류를 주다해-가정부는 숨어서 엿보고 있었다.
이어 가정부의 엿보기는 백도훈(정윤호)에게 옮겨갔다. 전날 차재웅(권상우)과 갈등을 빚고 멱살을 잡았던 백도훈은, 화해하고자 차재웅의 사무실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차재웅이 홍안심(이일화)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마치 백도훈이 엿듣길 고대했다는 듯이, 하류(차재웅)-엄삼도-홍안심은 사무실 문을 반쯤 열어두는 허술함을 드러냈다.
또 백학그룹을 찾아온 양택배(권현상)가 로비에서 주다해와 만나는 장면을 백도훈이 2층에서 엿본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주다해가 하류에게 무릎을 꿇는 장면에서도, 다해의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열린 방문을 향해 백도훈이 걸어가고 있었다. 즉 야왕 14회에서 가정부-백도훈의 ‘엿보기&엿듣기’가 총 5회씩이나 등장한다.
하류가 술마시는 장면은 어떤가. 14회에서 총 5회가 등장한다. 하류는 아버지(고인범)의 생일을 맞아, 석수정(고준희)과 함께 생일파티를 했다. 하류는 아버지에게 소주를 권한 것을 시작으로, 포장마차에서 석수정과 소주를, 바에서 백도훈과 양주를, 레스토랑에서 백도경과 와인을, 사무실에서 엄삼도와 소주를 마셨다. 드라마에서 가장 정적이고 지루한 수 있는 술 마시기가 한 회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등장한 것이다.
술 장면의 더 큰 문제는, 주다해를 향한 하류의 복수의지도 반감된 인상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차재웅을 잃고 아파하는 석수정이나, 백도훈에게 상처받은 백도경을 대하는 하류의 눈빛은 복수드라마보단 멜로드라마에 어울렸다. 하류에게 주다해(복수)는 없었고, 석수정-백도경을 놓고 갈등(사랑)하고 싶은 한 남자가 보였다.
다시 말해, 하류에게 복수할 의지나 필요성이 옅어진 느낌이랄까. 하류는 와인을 마시며 백도경에게 자신의 인생을 살라며 충고하지만, 사실 하류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류는 더 이상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옆에서 엄삼도가 딸 은별이를 상기시키며, 반드시 복수해야 된다고 주입하고 부추기는 것 같은 분위기. 끌어들인 엄삼도에게 미안해서 하는 복수. 마지못해 하는 복수. 후회중인 하류처럼 보였다.
야왕 14회에서 하류만 이상해진 건 아니었다. 백학그룹 백창학(이덕화)회장도 이상하다. 자신의 물에 누군가 독극물을 탔는데, 더 이상 범인 추적을 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독극물도 한번쯤 마실 수 있다는 생각인가. 더 웃긴 건, 석태일(정호빈) 대통령만들기에 백학그룹의 운명이 달렸다면서, 자식인 백도경-백도훈을 배제하고, 차재웅-주다해에게 007가방을 내놓고 무한 신뢰를 보내는 건 뭘까. 피한방울 안 섞인 차재웅-주다해에게 보안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며, 구멍가게가 아닌 백학그룹의 운명을 맡긴 백회장의 뇌구조가 궁금하다.
하류에게 주다해가 무릎을 꿇었다. 권투로 치면 수건을 던진 셈이다. 이 또한 얼마나 맥빠지는가. 주다해는 정말 하류를 스토커로 생각하는 건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다. 주다해가 무릎을 꿇는 식으로 백기를 들면, 그게 아무리 쇼라고 해도, 하류가 복수해야 할 당위성이 약해진다. 주다해가 반칙을 일삼고 더욱 악랄해져도 모자랄 판에, 왜 하류를 바보로 만들까. 안 그래도 복수가 내키지 않아 보이는 하류에게 말이다. 야왕 14회를 보면 망가진 복수는 이쯤에서 접고, 차라리 '김성령-권상우-고준희' 불타는 삼각관계를 다룬 멜로드라마로의 변신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움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