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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남자 송중기, 미소속 불친절한 기억

바람을가르다 2012. 10. 18. 11:52

 

 

 

17일 방송된 수목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11회에서, 한재희(박시연)와 한재식(양익준)이 알고 있는 집은 위험하다며 이삿짐을 싸고 있는 강마루(송중기)에게 친구 박재길(이광수)이 되물었다. 뭔 소리냐고. 그동안 재희-재식남매가 마루네 집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그 전엔 이사하자고 노래를 해도 꿈적 안하던 네가, 왜 갑자기 이사를 서두르는지 진짜 이유에 대해서.

 

그러자 마루는 “돌아왔잖아, 서은기.”라고 대답했다. 이에 재길은, 그럼 그동안 재희누나처럼 서은기(문채원)를 기다렸던 거냐며, “너 은기씨, 좋아하냐(사랑하냐)?”라고 물었다. 마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웬만한 드라마에선 주인공의 절친이 물으면, 술 한잔 걸치고서라도 속시원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법도 한데, 착한남자 강마루는 답답할 정도로 가슴에 묻는다. 덕분에 시청자도, 마루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애매하고, 답답할 수 있다. 제작진이 너무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마루는, 재길의 말처럼 서은기를 사랑하고 있을까. 사랑하고 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은기가 비오는 날 맨발로 마루를 찾아와 사랑고백하고, 키스를 했던 시점일까. 아니면 아직은 마루가 은기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닐까. 솔직히 마루가 언제부터 은기를 사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다. 다만 교통사고 이전에 마루가 은기를 사랑했던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사실 마루 본인조차도 언제부터 은기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런 마루를, 은기가 깨닫게 해주었다. ‘강마루가 서은기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어디서? 이별을 얘기하던 바닷가에서.

 

별장에서 한재희의 자작극을 확인한 강마루는, 그녀와 완전한 이별을 선언했다. 이별이라기보단 포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루는 은기를 찾아 바닷가에 나타났다. 자신과 재희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은기에게, 재희의 마음을 돌리려 은기를 이용했던 자신의 용서를 구하고 떠나려 했다. 그래서 은기가 이곳에 누구와 왔었냐는 질문에, 마루는 ‘사랑하는’이 아닌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 한재희와 함께 오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리고 마루가 은기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재희누나와 내관계?” 첫 번째 질문이 중요하다. 내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상대방을 대하는가를 알 수 있다. 즉 마루가 은기에게 궁금해 한 건, 자신과 재희와의 관계에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대한 은기의 감정이 아니라, 관계를 처음 알게 된 시점인 ‘언제’였다. 왜 마루는 ‘언제?’를 가장 궁금해 했을까. 그건 강마루라는 남자가 본능적으로 ‘숫자’나 ‘시간’에 대한 개념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은기가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마루는 100% 인정하고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든 걸 버릴 수 있을 만큼, 서은기가 나(강마루)를 사랑한다고? 나를 ‘얼마나’ 만났다고?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길래? 마루는 재희를 ‘15년’ 넘게 사랑했다. 그렇게 15년이 넘도록 사랑했지만, 마루는 재희의 마음을 온전히 가질 수 없었다. 마루의 눈에 재희는 탐욕을 쫓아 밑바닥으로 추락중이었지만, 끝내 마루는 재희를 붙잡아주지 못했다.

 

 

 

15년을 넘게 자신의 모든 걸 바쳤지만, 마루의 사랑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은기가 빗속을 뚫고 맨발로 찾아와,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은기가 마루를 사랑한 기간이 길게 잡아도 15일? 한 달? 즉 15년과 15일의 차이가 있다.


강마루의 눈에 서은기의 사랑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사춘기 소녀의 일시적인 충동쯤 될까? 태산그룹이란 값 비싼 울타리에서 곱게 자란 외동딸이 세상물정 모르고, 그저 외모 좀 되고 착한 척한 남자에게 끌려 잠시 이성을 잃은 것. 나란 남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에 목매는 은기의 모습이 측은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건 사랑이 아니야. 넌 아직 사랑을 몰라.’ 재희를 붙잡겠단 욕심에, 순진한 은기를 꼬득인 걸 마루는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강마루의 첫 질문 ‘언제부터 알고 있어요, 재희누나랑 내 관계?’에 대한 서은기의 대답이 마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게 중요해요?” 은기의 반문이 마루의 15년 사랑을 순식간에 지워 버린다. 마루가 사랑에 대해 깨닫지 못한 부분을 건드렸다. 사랑이란 감정이, 가치가 반드시 ‘시간’과 비례하진 않는다는 것. 15년, 15일이란 숫자에 민감해서 은기의 사랑을 가볍게 여겼던 마루의 오만을 일깨웠다. 그 순간부터 마루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은기를 이미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마치 부정하려 몸부림치듯, 은기에게 상처가 되는 막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시청자가 가장 궁금해 할 법한, 교통사고 직전 은기의 차량을 본 강마루의 두 가지 미소 속 의미를 해석해 볼 수 있다. 은기가 떠난 후 바닷가에 홀로 남은 마루는, 은기에 대한 미련을 감추지 못한다. 뒤늦게 은기에 대한 사랑을, 소중함을 깨닫지만, 여전히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 발목을 잡는다. 그런데 은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은기와 사랑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 하지만 이내 은기는 마루의 차량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고, 마루는 피하지 않으며 두 번째 미소를, ‘체념’의 미소를 지었다. 신이 있다면 모를까. 불쌍한 강마루 인생에 기회가 있을 리가... 신은 죽었다.

 

 

 

사고 이후 1년여 만에, 마루의 눈앞에 은기가 돌아왔다. 은기는 모든 기억을 잃었다. 마루를 사랑하는 건 은기의 기억이 아닌 '심장'에 의존한다. 한재희-강마루 등 사람에게 상처받은 가슴이. 반면 은기를 사랑하는 마루는 기억이란 '머리'에 의존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출혈이 계속 진행중인 상처입은 뇌가.

 

착한남자 11회에서 은기는 재식의 말을 무턱대고 믿었다며 돌대가리냐고 불같이 화내는 마루에게 또 한번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마루가 집에 찾아왔을 때, 방문을 걸어 잠궜다. 은기의 문을 열게 한 건, 마루의 기억이었다. 은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얘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기를 향한 마루의 고해성사이기도 했다. 동시에 은기의 사랑을, 소중함을 곱씹을 수 있는 기억을 통해, 신은 없다며 나쁜 남자로 망가졌던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작이기도 했다.

 

 

 

기억은 순수하다. 순수하기 때문에, 때가 묻을수록 기억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루는 은기에게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두렵다. 조심스럽다. 은기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의 차량으로 돌진했던 은기의 위험한 도발이 악몽처럼 매번 되살아나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 은기가 기억을 찾아갈수록, 결국 마루와 은기의 상처도 덧나고 아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태산그룹에 은기가 나타나자, 당황한 한재희와 은기의 약혼자로 소개받고 여유로운 미소에 태연한 척한 강마루는, 근본적으로 은기의 ‘기억’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지 은기의 기억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택한 남자 강마루의 ‘두려움’과 은기의 기억을 희생시켜야 살 수 있는 한재희의 ‘두려움’이 다를 뿐. 때문에 마루와 재희는 예전보다 더 강하게 부딪힐 운명에 놓였고, 그들이 말했지만 차마 갈 수 없었던 시궁창보다 더한 밑바닥의 끝을 향해 이제는 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서은기의 기억을 깨우는 단초였던 스콧 메켄지 ‘San Francisco’의 노래가 서늘하고 슬프게 들렸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