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및 드라마

각시탈 마지막회, ‘좋은’과 ‘잘 만든’ 드라마의 차이

바람을가르다 2012. 9. 7. 09:27

 

 

 

6일 방송된 수목드라마 ‘각시탈’ 마지막회에서 주인공들의 운명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기무라 슌지(박기웅)의 총에 이강토(주원)를 대신해 맞았던 오목단(진세연)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목단의 죽음이 불러 온 나비효과는 강토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지만, 그녀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였던 슌지는 자살을 택했다. 한편 각시탈 이강토덕분에 키쇼카이 우에노회장(전국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우에노 리에(한채아)는 혼자라서 비록 쓸쓸하지만 채홍주의 이름을 되찾고 제 2의 인생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주인공 이강토가 살아남았고 그의 상징이었던 각시탈의 정신이, 일제강점기속에서 고통 받는 많은 조선인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음을 뚜렷하게 알리는 대규모 군중의 대한독립만세운동은 해피엔딩에 가깝다. 그러나 강토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신부였던 오목단의 죽음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드라마를 즐겨보던 는 시청자에게도 각시탈은 새드엔딩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완성도 측면에서 각시탈 마지막회는 어땠을까. 시청자의 의견은 엇갈렸다. 감동을 받은 시청자도 많았지만, 실망감을 드러내는 시청자도 못지않다. 개인적으론 후자의 견해와 맞물린다. 애초부터 ‘각시탈’에게 같은 시대를 다뤘던 ‘여명의 눈동자’급의 감동과 여운을 바라진 않았다. 20세기 최고의 드라마로 꼽히는 여명의눈동자와 각시탈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무리이고 요행에 가깝다. 스케일이나 스토리의 완성도면에서 여명의눈동자는 워낙 독보적이다.

 

때문에 각시탈에게 기대했던 건, 스토리보다는 캐릭터의 개연성이었다. 극이 다소 허술해도 배우들의 열연과 캐릭터의 개연성만 담보되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정도의 드라마. 그러나 각시탈은 중반이후 주요캐릭터들의 개연성에 틈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지막회에선 사실상 붕괴됐다. 그동안 시청자에게 민폐여주인공으로 비판받던 오목단이, 오히려 마지막회에선 유일하게 개연성이 느껴졌을 뿐, 나머지 캐릭터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드라마의 완성도를 허물었다.

 

 

 

목단은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강토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가 강토를 대신해 슌지의 총에 죽는 희생을 택한다. 누가 봐도 설득력이 느껴지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반대로 홍주는 어떤가. 극 후반부부터 슌지와의 만남이 잦아지더니, 결국 강토-슌지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둘 중에 한남자만 걸려라는 식의 행보를 보이고 말았다. 캐릭터가 어느 순간 굉장히 수동적으로 바뀌었고 마지막회의 존재감마저 흐릿하게 각인됐다. 

 

주인공 이강토는 어떤가. 드라마가 마지막회에선 워낙 급박하게 이뤄지다보니, 신부 오목단을 잃고 아파하고 방황할 겨를이 없었다. 목단의 무덤앞에서 멘붕상태로 목놓아 울던 강토는 백건(전현)이 등장해 몇 마디 던지자, 슬픔을 거두고 각시탈의 행보를 침착하게 이어간다. 차라리 강토가 분노로 가득 차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 무엇보다 황당한 건, 우에노회장을 찾아가 일본의 욕심때문에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은 가족과 동료를 잃었다는 말을 할 때였다.

 

 

 

그 대목에서 강토는 슌지도 당신때문에 가족을 잃었다는 말을 왜 했을까. 사랑하는 아내 목단을 살해한 슌지를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슌지는 원래 착한 사람이라고 변호하는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목단이 죽은 건 벌써 까맣게 잊은 듯, 슌지를 향한 분노는 보이지 않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강토는, 이름없는 영웅에 평범한 조선인이 아니라 모든 걸 해탈한 성인군자 이강토선생에 가까웠다.

 

슌지의 자살은 더 황당했다. 슌지가 각성을 하고자 했다면 27회에서 강토가 그의 목숨을 살려줬을 때가 설득력이 있었다. 아버지 타로(천호진)가 죽었을 때도 변하지 않았던 슌지가 결혼식을 피로 물들이고 목단을 죽였다고 해서, 그가 자살할 위인으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중간에 각시탈을 쫓고 홍주를 만나느라 목단도 잠시 잊고 살았던 슌지가 막판에 광적으로 집착한 자체부터가 매끄럽지 않았다. 차라리 끝까지 강토와 대립하며 강토의 손에 죽는 편이 나았다.

 

 

 

마지막회에 이뤄진 슌지의 급한 각성과 자살행위는, 그의 악행을 덮고 극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제작진이 슌지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지나치게 개입시켰다는 인상을 주고 말았다. 작가는 드라마가 시작하고 캐릭터를 설정한 이후부터는 상황만 던져 놓고, 누구의 편이 아닌 철저히 제 3자의 시선으로 캐릭터들을 지켜보고 묘사해야 한다. 그래야 캐릭터가 개연성을 이어가고 성장함에 있어 유연해진다.

 

그런데 각시탈의 경우, 제작진이 슌지라는 캐릭터에 과하게 애정을 쏟고 집착하는 인상을 주더니, 마지막회에선 ‘슌지는 원래 착한 일본인이다.’에 주력해 극을 전개해 나갔다. 이를 위해 슌지를 죽이지 말라는 홍주의 부탁, 슌지는 가족을 잃었다는 강토의 발언, 슌지와 강토의 오붓한 술한잔 등이 등장했다. 결국 제작진은 각시탈의 마지막회를 슌지의 자살로 미화시키기 바빴던 셈이다. 그럴 시간에 목단을 잃어 슬퍼하고 분노해야 할 이강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낫지 않았을까.

 

 

 

드라마 각시탈은 시청률 20%가 넘을 정도로, 시청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긍정의 효과를 낳아 좋은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주원-박기웅-진세연 등 젊은 배우들의 열연과 재발견은 분명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마지막회에서 재차 드러났듯이, 등장인물들에 대한 제작진의 과한 사랑이 빚은 캐릭터의 개연성 실종은, 인기 많고 ‘좋은’ 드라마가 반드시 ‘잘 만든’ 드라마로 직결될 순 없음을 보여준다.